이 마을은 망모산을 주산으로 하여 앞에는 안산이 있으며 西龍亭 새모실 청호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西龍亭 마을은 청호 마을 남쪽에 있는데 왜 서용정이라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새모실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란 의미이다. 청호에는 윗첨 아래첨 큰잔등 뒷등 동쪽으로 불리는 지역이 있었다.
지명유래
청호는 청호2리에 속하는 마을로 영산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 주변에는호수를 나타내는 ‘湖’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대불공단의 三湖, 영암군의 西湖, 그리고 일로의 淸湖 龍湖다. 예전에는 영산강 물이 맑고 깨끗해 마치 호수와 같다 해서 즐겨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망모산은 주룡마을의 입향조인 나덕명이 어머니를 그리워 했다는 데서 연유한효자산으로 청호리와 망월리의 6개 마을이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남해안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한반도 서남부의 L자형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마을 주변으로는 철로 건설이 계획되고 있어 주민들은 개발에대한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박씨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남평문씨 문중에서 입향조를 찾았다. 마을유래지에는‘경상도 창원에서 세거하던 남평문씨 문칠성이 청계면으로 왔으며 그의 손자인 문옥선(자 - 미보, 1638 - ?)이 1668년 이곳으로 분가하여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마을인 주룡마을이 나주나씨 집성촌이고 그 마을의 입향조인 나덕명이 임진왜란 무렵에 마을을 형성한 것을 보면 이 마을도 나주나씨와 관련된 성씨가 입향조일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남평 문씨와 나주 나씨가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靑湖리로 나오나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일로면 淸湖리,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청호리 淸湖동으로 나온다. 즉 한자의 표기가 靑에서 淸으로 바뀐 것이다. 참고로이유는 모르겠지만 목포에도 청호의 지명이 많다. 예를 들면 靑湖로타리클럽 靑湖중학교와 靑湖시장 등이 그것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예전엔 목화를 주로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서남부 지역 무화과의 원산지이다. 마을 곳곳에 심어진 무화과는 해방되던 해에 목포 갓바위에서 재배되던 것을 인분을 실어 나르던 한 주민이 가지를 꺾어 마을에 삽목하여 번식한 것이 현재의 단지로 발전하였다. 이런 무화과 단지는 아랫 마을인 우비마을에도 많이 있는데유독 청호리에서 재배되는 무화과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었다. 왜냐하면 해풍의 영향과 따뜻한 기후로 당도가 높고 빛깔이 선명해 상품으로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산강이 막히고 해풍이 차단되면서 예전의 당도가 높은 무화과는 생산이 어렵게 되었다. 현재 마을의 주된 소득 작목은 무화과를 포함하여 시금치 갓 옥수수이다.
주 업은 논농사며 망모산 비탈진 밭엔 양념류등
을 심고 있다. 영산호 간척지가 생기면서 여유로운 마을이자 남악/오룡 신도시 배후지로 지가가 높다. 친환경마을 선정/마을 입구 꽃길 조성하였고 80여년전 목포 갓바위에서 무화과 반입하여 지역특산물로 자리잡았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1994년에 설립된 청망분교인데 청호리와 망월리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교명이다. 현재 이 청망분교는 남악리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할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하다.
1932년에 설립한 대한예수교회 장로회 소속 청호교회(정의건 목사 시무)가 있다
마을변화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을 때 영산강 주변에서는각종 어류들이 많이 잡혔다. 몽탄 명산의 장어와 실뱀장어, 몽탄 갈산의 농게, 그리고 멍수바우 주변의 굴이 있다. 일로의 돈도리에서는 서리기, 짱뚱어, 맛, 게 등이잡혔고, 아랫마을 망월리 비로촌에서는 서대, 낙지 등이 잡혔다. 뿐만 아니라 소댕이 나루와 주룡나루터 사이에는 상깽이(돌고래)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일로 인의산 주변에는 맛, 게, 대가이, 짱뚱어가 나왔고 두껍바우 일대는 낚시보다 손으로 운저리를 더 많이 잡을 정도로 어종이 풍부했다. 청호 마을에서도 낙지 뿐 아니라 서대 숭어 등이 많이 나와 농산물을 재배하기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영산호 간척 이전에는 바다/갯벌 식재료등이 많이
잡혔고 해파리염장 시설물이 있었고 인분저장시
설등이 있었다. 황석어, 송어배가 들어와 곡물과
바꿔가기도 하였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부녀회 그리고 청년회(목포 출향인)가 있으며 동계를 지낸다.
또한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여름철엔 삼복(초복 중복 말복)을 기해 마을 잔치를 벌였으며경로잔치를 하기도 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 앞샘 또는 통샘이라고부르는 들샘이 있다. 윗샘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들샘은 5마력으로 품어도 물이 나왔고 지금도 있다.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태원여객 버스 2대가 마을에서 자고출발했다.
120여명 넘게 버스를 타고 다녔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들샘과 앞샘은 통샘이었고 아랫샘은 회관앞에 있었으며 마을 위쪽은 윗샘이 있었다. 이 지역이 암반이라 물이 귀해 가뭄에는 구정리에서 물을 가져와 사용했다.
동/식물
당산나무는 고목이 되어 죽었다. 교회옆 소나무는 간솔을 많이 해서 쓰러졌다.
붕어.숭어.낙지,서대,장어. 농어. 황가오리.대갱
이.칠게.맛등이 잡혔으나 영산호 간척 이후 담수호가 되어 어종이 바뀌고 없다. 서대는 보리누름에 맛있다고 한다. 농어는 일꾼들 술참으로 주었다고 한다. 상사바위 모퉁이에서 황복이 나왔다고 한다. 대갱이는 말려서 구워서 두드려서 마늘잎과 무쳐먹었는데 이때 마늘은 민마늘로 잎을 먹는 마늘이다. 대갱이 에를 끓여서 먹어도 맛있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황서리, 숭어를 싣고 와서 보리랑 바꿔먹기도 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에 배닿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배가 닿는 골이라는 의미인데 나주나씨 족보에는 ‘舟橋吐乙’이라 표기되었다. 또한 장짓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장자등에서 변한 이름이다. 대체로 장짓등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샘이 두 개 있다 해서 쌍정(雙井)이란 지명도 있으며 장짓등 옆에는 조금에 건널 수 있는 조금나루도 있다. 또한 조금나루 옆에는 노랑샛금이란 지명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노랑샛금은 장짓등 욱독 하나 건네고 그 위에 산 앞에 섬이 세 개였는데 콩섬, 진섬, 팽나무 섬이 있었다. 그 중 팽나무섬은 백로와 왜가리가 많았다.
손버버리(산버버리라고도 함)라는 지명도 있다. 손씨 버버리 형제 셋이 묻혀 있다는 이름이다. 산버버리는 마을 동쪽으로 돌아가면 산이 있는데 망모산을 올라가기 전 산으로 버버리가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댄제는 올라가기 힘들다고 하여 댄제라 부른다. 조금나루는 조금때 배가 들어와서 조금나루라고 불리웠다.
윗첨, 아래첨, 큰잔등, 뒷등 동쪽등이 있다.
나상옥씨 가옥은 배가 닿고 비료를 실어오는 배가 7~8척 되고 중선배도 3~4척 되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70여년 전 6월 유두때는 마을 주민이 모여 천막치고 잔치하고 놀았으며 정월 대보름 때는 풍물놀이를 하였다. 정원 보름에는 지신밟기도 하였다.
유물, 유적
새모실에 남평문씨 제각이 있다. 제각의 현판은 없지만 삼문이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4칸의 기와집이다. 초가로 기울어져 가던 것을 1996년에 중건하였다. 음력 10월 14일에 제를 지낸다.
남평문씨 제각은 삼문과 팔작지붕이며 정면4칸
기와집으로 1996년 중건하였으며 청망분교에 800
평 기증한 문충식씨 공덕비가 학교옆에 있다
설화
상사바위 전설- 6·25전에 상사풀이를 하였는데 배가 위에서 오거나 아래에서 오면 배를 기다렸다고 하고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여 3~4일동안 진행했다고 한다.
상사바위 위 바위를 천냥바위라고 부른다 물살이 쎄서 쌀을 실은 배가 침몰되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문충식( 1941-1996년)씨는 사업가이자 재경 무안
군 향우회회장. 무안출신 공직자 승달회 조직. 무
안발전협의회. 전남도청 이전시 많은 영향력을 끼
친 사람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에서는 한국전쟁 때 주민 중 두 명이 피해를 봤다. 그중 한명은 빨치산투쟁을 하던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시 2사람이 사망했으며 청호교회에 인민
군이 본부 차려놓고 있었다. 그때 주룡마을 나판
수씨가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여 인명피해가 줄었
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과 마을 이장의 노력으로 친환경 마을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마을환경이 깨끗해졌으며 마을 입구의 꽃길 조성은 주민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망모산에서 바라본 영산호 풍경이 멋지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목포에서 합수(인분)을 실어와 농작물 밑거름으로 사용
하여 농작물의 성장을 도왔다. 유달산 아래에서도 가져오고 한 배에 3~4명 또는 4~5명이 선창에서 내려서 똥장군으로 배에 담았다가 똥장군으로 퍼서 냈다. 똥 당꼬가 있었다. 후에 나주 비료공장이 생기고 하지않았다고 한다.
가져온 인분은 빈 밭에 뿌려 쟁기질 해서 놔뒀다가 작물을 심었다. 배를 운영했던 시기는 1960년대 초까지 였다고 한다.
*청호교회 1932년 설립.:목포 공생원의 설립자 윤
치호씨가 오가며 전도사로 있었고 누나가 이 마을
로 시집 왔고 윤전도사님 아버지께서도 자주 오셔
서 예배드렸다. 연극도하고 주일학교 공연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