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정마을은 월선3리에 속하는 마을로 노월촌, 석대정, 한치, 일신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는 월해(月亥. 돈곡) 마을도 포함되었으나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금은 청계3리에 해당된다. 원래 월선리는 한 마을이었으나 분구되어 월선리 1, 2, 3구가 되었다. 그래서 마을입구의 표지석에는 월선리라고 통칭하여 표기되어 있다.
지명유래
석대정은 ‘비석거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현재 마을 앞을 지나는 815번 지방도를 따라 달산리를 지나 구릿재를 통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길가에 비석거리가 있었다. 당시 마을에 살던 경주이씨 이덕관(1700~1758)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은계찰방을 지냈던 사람으로 세도가 커서 주민들은 이찰방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지금 전조단이 있는 곳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향교나 국가에 공훈이 높은 현인을 제향하는 서원 앞 등에서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경건한 몸가짐을 가지라는 뜻으로 세웠던 표지석이다. 그런데 향교나 서원이 없던 길가에 어떤 연유로 세워져 있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비석거리는 현재의 이름인 석대정으로 바뀌었다. 현재 하마비는 없어졌지만, 주민들은 구전(口傳)으로 이를 전하고 있다.
노월촌은 마을 앞의 갈대 속에 스며있는 달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며, 학유정에 있던 영진포구가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하천 곳곳에는 바닷가에만 사는 갈대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
일신동은 원래 함양의 신처사((申處士)가 처음 입향하여 日申洞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날로 새로워지라는 의미의 日新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삼향읍에 속했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한치(寒峙)는 차가운 고개라는 뜻으로 원래는 월선리에서 국사봉 산등성이를 타고 군산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개라는 뜻으로 대치(大峙)라고 불렀다가 한치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길은 한치, 덕골, 말뫼산 방향에서 현재의 삼향 지산리인 장곡으로 모였다가 군산동 유교리로 고개를 넘어다니던 길이라고 추정된다. 이 길은 또한 거꾸로 한양으로 올라가던 길은 월선2구 지제의 뒤쪽 산등성이를 넘는 꾸릿재를 넘어 몽탄의 달산리와 봉명리를 지나 섯재를 넘어, 몽탄 파군다리와 두대산 오갈치로 이어지던 길이라고 장곡의 주민이 전해주었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박씨와 경주이씨가 마을의 입향조로 추정되며, 무안박씨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박제 장군의 현손인 연국당 박천주(戀國堂 朴天珠, 1658-1688)로, 공은 나라에서 하사받은 연국당이 있는 함평 만흥리에서 거주하다가 월선리로 이거하여, 이후 석대정, 한치마을 등으로 분가하여 살았다. 이에 대해 전해오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박씨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을 어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6.25한국전쟁 때는 좌익인사들이 많아 박씨들이 피해를 많이 보기도 하였다.
또한, 경주이씨 입향조인 이황(李璜, 1619-1667) 선생의 입향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황의 묘가 월선리 맞은 편의 삼향면 안치산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입향조로 추정된다. 안치산은 마계산이라고 부르는 산으로 이후의 족보를 보면 이황 선생 이후의 경주이씨 후손들은 대부분 월선리에 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후손 이세탁(1738 ~?)은 자녀가 없어 아버지 형제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마을에서 전조제를 지낼 때 이처사 부부의 제사상을 따로 마련하게 된 동기로 추정된다. 족보에는 그의 묘가 일신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고씨, 이씨가 제일 먼저 들어온 것으로도 알고 있다고 하나 확신할 수는 없다. 또한 후에 박씨와 문씨 같은 부자가 한치마을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확인이 어렵다. 현재 고씨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석대정 마을은 원래 월선리에 속한 노월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삼향면 지산리에 속하는 마을이었다. 현재의 월선 1구와 2구를 포함해서 통칭 월선리였고, 이는 청계만 아래 하천을 타고 들어온 갯물이 노월촌까지 밀고 들어오는 자연경계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 월선리 1구와 2구는 한군데로 뭉쳐있는 마을이지만, 청계3구 석대정 마을은 길을 따라 각기 흩어져 있는 형국의 마을이다. 그리하여 석대정 마을 앞의 가파른 몰뫼산(마계산)을 비롯하여 칼봉산과 투구봉 그리고 남양홍씨, 나주김씨 등의 묘들이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형국인데, 이를 풍수에서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 펼쳐져 있다고 본다. 이는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형국으로, 목포의 3대부자로 불리면서 근대 초기에 무안감리 등으로 활동하며 풍수에 밝았던 초정 김성규의 아들인 근대 최초의 희곡작가 김우진의 초혼묘가 말뫼산 정상에 있는 연유 역시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마을 뒤에 있는 산정뫼(山井)이다. ‘산에 우물이 있을 것이라는 예견지명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던 산의 이름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몽탄 달산리 저수지의 물을 끌어다가 산정뫼에 있는 4개의 저수조로 올려 정수를 한 후 목포 시내까지 상수도로 배급하였다.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해방 후에 4개의 저수조를 더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그 뒤에 이곳에는 목포기능대학교가 들어서려고 추진하다가 토지수용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포기하고 송현리로 가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그 앞의 산자락에 전라남도와 모 건설회사에서 은퇴자 대상 가든하우스를 건설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승달산 자락의 산림과 청계, 일로는 물론 목포, 나주 등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인 마을의 형국이 그만큼 사람의 주거공간으로 친화적인 형국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지금은 혼합성씨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비석거리로 해서 석대정으로 붙은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렇지만 입향조로 추정되는 신씨(申氏)와 관련된 일신동(日申洞)이 현재의 마을 명칭인 일신동(日新洞)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1917년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또한 한치마을 역시 예전에는 긴 고개라는 뜻으로 대치(大峙)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추운 고개라는 뜻의 한치(寒峙)로 바뀌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무안군 일서면 지역으로 1789년에 간행된《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고,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주변 마을을 합하여 월선리라고 하였다. 삼향면 지산리에 속했던 일신동, 한치로 지명이 바뀌면서 대치리 등이 월선3리가 되었다. 현재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 3구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월선 1구와 2구에 비해서 외부 유입 인구가 적지 않은 편이나 기존 생활 부분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네 개의 자연마을로 흩어져 있는 월선 3구 석대정 마을은 각각 마을마다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월선리 초입에 자리한 석대정 마을은 주변에 다양한 시설들이 생겨나고 있고, 가장 안쪽에 자리한 노월촌은 인공 소음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 깨끗한 자연환경으로 하여 최근 유입하는 이들이 많이 틀었다. 물론 도로 건너편의 뒷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한치마을에도 오래전부터 인근 도시의 젊은 세대들이 세련된 현대주택을 지어서 많이 이거해왔다. 또한, 한골농장을 비롯하여 농산물 저장창고 등이 들어선 일신동 역시 마찬가지로 친환경 마을로 새롭게 일신하고 있다.
이처럼 개별적으로 각기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편리한 교통환경 등 자연친화적인 거주공간으로 거듭 난 석대정마을은 벼농사, 축산업, 양파 등의 농사를 짓는 선주민과 귀촌한 은퇴자와 출근하는 직장인 등이 어우러진 무지개마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월선교회, 목포장애인요양원, 엘림복지타운 노인요양원과 수양관, 월선리 청년회관 등이 있다.
마을변화
원래부터 석대정 마을은 청계면, 일로읍, 삼향읍 등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삼향면 유교리에서 국사봉 옆의 산등성이인 장곡과 한치마을을 거쳐 월선2구 지제마을의 구릿재를 넘어 몽탄으로 이어져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물론 마을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계산 역시 타고 가는 말을 묶어놓고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고 해서 말뫼봉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세 개의 주막이 있었을 정도로 통행인이 많았으며, 월선리의 농사와 무사한 통행을 기원하는 다리의 축조와 관련한 전조제를 지내는 전조단이 설치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석대정마을의 특성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전통적인 농사는 물론 편리한 교통환경으로 도시민들이 이입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흩어져 있는 마을의 공간환경에 더하여 다종다양한 주민들이 어우러지다 보니 적지 않은 갈등이나 혼돈이 없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월선리의 여러 마을 중에서 가장 먼저 도시적 특성으로 변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월선리연합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월선제일교회
전통식품/특산품
연잎된장, 행복한 샘 등 전통식품 업체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의 장군봉을 바라보는 국사봉 왼편 산줄기로 흩어져 자리한 석대정마을의 생태환경은 일찍이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월선리에 있는 네 개의 저수지 중에서 한치제가 있으며, 마을 주변에 송산골과 큰골 그리고 강씨 부자가 살았다는 강마골, 고씨 부자가 살았다는 공적골 등이 있다. 또한, 마을 입구 박씨 세장비가 있는 곳은 초분골이었으며, 그 옆에 자라고 있는 당산나무는 둘레가 4m에 이를 정도로 큰 시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마을 곳곳의 자연환경에 어울린 인간 삶의 흔적들이 깊이 새겨져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
동/식물
네 개의 마을을 비롯한 곳곳에 당산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월촌마을과 한치마을 앞의 당산나무는 지금도 그대로이지만, 석대정마을의 전조단 앞에 있던 당산나무는 그곳에 농지를 지닌 한 주민이 몇 년 전에 베어버려서 안타깝기만 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초분골, 산정뫼, 송산골, 큰골, 강마골, 공적골, 작을골, 항골, 숙구머리, 덕골 등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월선리의 다른 마을에 비해 평지에 있던 석대정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지신밟기 등을 했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또한, 일설에는 석대정, 노월촌, 일신동 마을과 함께 4년마다 한 번씩 지내던 월선리 당산제가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현존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고 있는 ‘전조제’와 ‘이처사제사’가 자랑이다. 매년 유월 유두날에 지내는 전조제(田祖祭)는 무안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마을제사이다. 농사를 헤치는 멸구 등 병충해 방제와 예전에 승달산에서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던 산물과 마을 안에까지 들어와 범람하던 갯물을 건너는 견고한 다리를 놓아 마을의 농사와 안녕을 기원하던 전조제는 여느 마을에서 행하는 당산제와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전조제(田祖祭)라는 명칭에서 보여주듯이, 이 제사는 전답을 관장하는 지신(地神)에게 주민들의 소망을 담아 들판(野)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원래 마을 앞으로 흐르는 커다란 개울에 ‘독다리’ 곧 석교(石橋)를 놓고서 이를 기념함과 동시에 무사함을 기원하는 뜻으로 제사가 이루어졌다고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조제는 월선리 1, 2, 3구에서 번갈아 가며 주관하며, 매년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날 밤 12시에 엄격한 절차에 의해 선임된 제관의 주관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조제의 제사상에는 두 그릇의 국과 밥이 올려진다. 한 그릇은 전조제의 지신(地神)에게 올리고, 또 한 그릇은 자손 없이 죽은 이처사 부부를 위한 것이다. 마을에서 대대로 지내오고 있는 ‘이처사제사’로, 오래전 이 마을에 살던 이 처사라는 이가 후손이 없어서 자신의 전답을 마을에 기부하며 자신을 위한 제사를 부탁하였던 마을의 역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민들 사이에선 이 처사의 묘에서 득남(得男)하기를 기원하면 원하는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외지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져서 많은 이 이 묘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현재 ‘한 골짜기에서 인물 난다.’라는 뜻을 표방한 <한골농장>의 서복현 대표가 선대 때부터 수십 년째 계속 이처사 부부묘를 관리하고 있다. 이처럼 석대정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 행사와 전조제, 이처사제사 등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겨 오늘날의 바람직한 마을공동체 문화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문화마을이라고 하겠다.
유물, 유적
일신동 마을 밭 가운데서 가마터로 보이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수많은 자기 파편이 발견되어서 주민들은 예전에 이곳에 가마터가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석대정마을에는 많은 묘역과 함께 재각들이 있다. 석대정마을에는 근대식 학교가 없던 일제강점기 때 이곳 아이들의 배움터이기도 했던 나주김씨 제각인 <석대정>이 있다. 마을이름으로 비롯되기도 한 것으로 여겨지는 석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90년대에 지어졌다. 그리고 노월촌마을에도 나주정씨 제각인 <운월재>가 있으며, 무안박씨 제각인 <연국당>도 있다. 연국당은 원래 함평 만흥리 국산마을에 있었는데, 이는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효종이 급작스레 붕어하자 이 마을출신 박천주(朴天株)가 마을 뒤 구릉에 여막을 짓고 부모상을 치루듯이 애도의 애를 다하여 후에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서 숙종 때 연국당(戀國堂)이란 당호를 내렸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호(號)를 연국당이라 하였는데, 이후 무안 청계면 월선리로 입향하여 12위의 조상들 위패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78년에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월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재실인데 현재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제각은 허물어지고 있었다고 지난 조사에서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으나 현장에는 역시 대나무와 잡초가 우거진 상태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함께했던 주민들이 아마 허물어졌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하였다.
또한, 석대정마을에는 전조단이 있는데 두 개의 비석과 고인돌로 여겨지는 큰 돌 세 개가 놓여있다. 두 개의 비석은 전조제 유래를 적은 것과 1769년에 독다리를 놓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진 시주비다. 세 개의 바위는 길이가 각각 310㎝ , 285㎝의 크기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그마한 바위다. 이중 큰 바위가 제단 옆 개천의 돌다리로 놓여졌던 것인데, 1980년대 시멘트 다리가 들어서면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마을회관 앞에는 1994년에 세워진 ‘오헌무안박공영호공적비’와 ‘인당김해김광호행적비’인데 김광호 선생은 현재 마을 개발위원회 김영선 위원장의 부친이다.
설화
한치마을에는 ‘숙구(宿狗)머리전설’ 곧 잠자는 개의 형국이라는 곳에 대한 전설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범산골의 호랑이가 잠자고 있는 개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라서 주민들은 이곳을 명당터라고 말한다. 즉, 호랑이는 잠자는 개를 잡아먹지 않기 때문에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호랑이 굴이 2개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숙구머리는 예전에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어서 주막이 몇 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각 재실에는 그마다의 <실기>들이 있을 터인데 확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신 전조단의 전조제 비문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록하는 차원에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 乾隆 三十四年 (1769年, 英祖 45年)己卯立月 日 大施主 嘉善大夫 鄭敏周/ 뒷면: 大施主 李氏. 東仙主 任章 朴光遂 施主 金扼玉 李世鐸 分(公 ? )功 申重哲 朴有玉 鐵物施主 李根 金采重 西化主 兼施主 申重昌(앞면: 건양 34년(1769년영조 45년)을묘입월 일대시주 가선대부 정민주/
뒷면: 대시주 이씨. 동선주 임장 박광수 시주 김액옥 이세탁 분(공?)공 신중철 박유옥 철물시주 이근 김채중 서화주 겸 시주 신중창)
앞의 ‘인당김해김광호행적비’와 관련한 내용으로 6.25한국전쟁 당시 김광호씨는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많이 구해줬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는 4-5명의 좌익인사가 있어서 마을주민들 간에 이념적인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평소에 밉보이던 인사들을 모아 처형하려고 했는데, 김광호씨가 나서서 무마시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것이다. 이때의 혼란으로 노월촌 무안박씨의 위세가 많이 꺾였다고 하는 후문도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노월촌은 옛 문헌인《호구총수》에도 나오는 지명으로 마을 앞 갈대밭에 스며있는 달빛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서정적인 이름인데 지금돋 마찬가지이다. 또한 말뫼산 봉우리의 김우진 초혼묘에 올라보는 목포와 영암 및 신안 일대의 섬들을 바라보며 조망하는 풍치가 아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