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3리인 장부교마을은 광주-목포간 도로가 지나가는 구암마을 삼거리에서 일로 쪽으로 약 1km쯤 들어오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학동, 당재, 중신기, 독골, 장부교 등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장부교 또는 장부다리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마을이름은,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월선리 계곡을 거쳐서 학유정 바다로 합류하는 물길이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하천에 설치했던 ‘장보’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청계천에는 성보, 줄보, 장보 등 세 개의 보가 있었다고 하는 데, 줄보는 방아다리 형국으로 세워진 다리이며, 장보는 긴 다리 또는 중간에 기둥을 받치지 않고 놓는 들보로 만든 다리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이 없기 때문에 주로 하천의 좁은 양쪽에 걸쳐서 놓는데, 1931년 일제강점기에 국도1호선 신작로를 잇는 양쪽이 좁은 부분 곧 예전 목포시장을 역임했던 이의 별장 앞으로 이어진 다리로 놓여서 주요한 도로가 되었다. 이에 마을이름까지 ‘장부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송학동은 청계2리 구암마을 맞은 편 언덕에 있는 마을로 1980년대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며, 당재마을은 원래 당치에서 비롯된 마을로 당나라 사람들이 넘었던 고개 이름이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도 지명이 나오는 마을로 승달산과 관련이 있다. 승달산의 원래 이름이 영취산이었는데 당나라 승려 500여 명이 이 산에 들어와 모두 도(道)를 깨치면서, 도를 얻고자 하는 승려는 이 산에 들어오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뜻의 ‘승달산(僧達山)’으로 바뀌었다. 당나라 승려들이 정족포에서 내려 승달산을 향해 올라갔던 고개가 바로 마을 뒷산인 당재(唐峙)였다.
중신기마을은 1917년의 자료에 나오는데, 마을 뒷산인 당치에는 사찰 터가 있었고 큰 샘도 있어서 중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이어서 지명이 중신기마을로 칭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독골마을은 원래 월해(月亥)마을로도 불렸는데, 마을의 주산(主山)인 투구봉이 돼지 형국이어서 돈곡(豚谷)이라 부르다가 독곡 곧 독골로 변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청계3리인 장부교마을의 입향조를 확실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다섯 마을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중신기마을의 주된 성씨가 한양조씨, 창령성씨, 밀양박씨, 수원백씨,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창령성씨가 먼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창령성씨의 입향조는 나주에서 온 성순보(자-구종, 1804-1970)이며, 밀양박씨 입향조는 삼향읍 석교에서 온 박옥림(자-춘서, 1822-?)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장군봉과 말매봉, 칼봉, 투구봉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는. 장군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앉아있는 형국인 장군대좌혈로써 나주김씨 문중에서 혈처에 묘를 써서 발복을 했다고 한다. 말을 매는 형국이어서 말매봉, 칼처럼 생긴 칼봉, 산정상에 있는 바위가 투구처럼 보여서 투구봉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명들을 활용하여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흥미롭다. 옛날에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돌아오면서 마계산에 말을 매어두고, 질마재에 말안장을 벗어놓으며, 칼봉에 칼을 내려두고, 투구봉에 투구를 벗어 놓은 후, 삼향읍의 왕수산(중등포 뒷산, 왕산 또는 목포의 유달산)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전투에서 패했음을 고했다며, 마을의 형국이 그러하다는 어찌보면 교묘한 풍수상의 해석을 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장보에서 비롯된 마을 명칭이 장부다리로 변했다가 장부교로 정해졌고, 원래 당치(唐峙)였다가 당재가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영취산이 승달산으로 된 설화가 전하며, 얼마 전까지 월선3리에 속했던 독골마을은 월해(月亥)마을 이었는데, 마을의 주산인 투구봉이 돼지형국이어서 돈곡(豚谷)이라 불렸던 곳이 독곡 또는 독골로 변한 것이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청계리는 무안군 일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행림리, 구암리, 학유정리, 가시동리, 당치, 중신기를 합하여 청계리라 해서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에 학유정마을에 둑이 축조되면서 새로운 농경지가 생긴 장부다리 주변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또한 구도로가 확장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향, 일로, 몽탄, 청계 등 네 개 지역의 사람들이 목포를 가거나 일로장을 볼 때 드나들었던 곳이어서 장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리하여 ‘삼향 동뫼에서는 윷놀이 자랑을 말고 장부다리에서는 화투자랑을 하지 말라!’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오래 전에 청계에 사는 촌부가 일로장에서 황소를 팔아서 돈을 지니고 오다가 이곳에서 도박으로 다 털렸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렇듯이 한 때는 마을ㅇ에 주막이 일곱 개 정도가 있을 정도로 돈과 사람이 넘쳐났던 곳이다. 현재 농사로는 벼농사와 함께 양파, 마늘 등 밭농사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이에, 여러 마을이 모여서 이뤄진 마을 구성과 함께 농사 및 상업 등 다양한 생업을 영위하는 주민들의 상황 때문에, 주민들의 단합이 염려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른 마을보다 양보와 협조가 잘 이뤄진다고 한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서는 이농현상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마을의 청계남초등학교를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살려낸 미담이 있다. 6.25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에 나주김씨 문중에서 땅을 희사하고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개교한 청계남초등학교는 현재 전교생 약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학교이다. 수년 전에 이러한 시골학교들 대부분이 도시학교로의 통폐합으로 폐교의 위기에 몰렸을 때,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월선리예술인마을의 예술인들과 연대하여 개방형 공모로 교장을 맞이하는 등 다양한 문화예술특화교육과정으로 학교를 지켜낸 것이었다. 이 학교는 ‘학생중심의 교육을 실천하여 자기 빛깔을 가꾸는 행복한 아이들! 학교와 함께 만들고 함께 즐기는 행복한 아이들! 학교라는 비전과 마음, 생각, 변화, 교육으로 자지 색깔을 가꾸는 학생들’을 목표로 교사, 학부모, 지역주민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인근 목포와 남악은 물론 무안 등에서까지 전학을 올 정도로 시골학교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마을변화
예전부터 영진포와 당포라고 불리던 정족포 등의 배후지역으로 흥성했던 장부교마을은, 근세기에 이르러 다시 신작로인 국도1호선으로 이어지는 장부교가 놓이고 학유정의 둑 축조를 통해 간척된 농경지가 생기면서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의 거점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구암마을 중심의 교통 및 물류기능 확충과 월선리 안쪽의 마을의 특성화된 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그저 완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로에 인접한 전원주거마을 내지는 시골친화적인 상권의 형성 등 다양한 진행방향에 대해서는 더욱 큰 고민이 잇따라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당치와 독골, 중신기마을 등 거주지 자체가 산 아래 낮은 구릉지로 내려오면서 산중의 땅속에 묻혀 있는 각종 역사적인 유물, 유적과 문화콘텐츠를 찾아내어 활용하는 일은 그 중요한 핵심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청년회, 노인회, 부녀회 등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순복음청계교회, 청계남초등학교
전통식품/특산품
장부식육식당(돼지고기)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월선리를 거쳐 마을 앞으로 흘러 학유정 둑방을 지나 서해바다로 이르는 청계천은 마을의 농경지 등을 물들이는 젖줄이다. 또한, 원래 월해(月亥)마을 곧 돼지형국의 주산인 투구봉으로 해서 돈곡(豚谷)에서 독골로 부르게 된 독골마을의 돼지 샅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샘에서 나오는 물은 물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다. 1967년과 68년의 큰 한해(大旱害)때에도 마르지 않았던 샘인데, 여자의 성기를 닮은 샘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계곡 등에 돼지돈사가 들어서면서 물이 오염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는 두 개의 재각이 있는데, 나주김씨 재각인 ‘석류정(錫類亭)’은 주변에 학교가 없었던 일제강점기 때 아이들의 배움터이기도 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90년대에 지어진 석류정은 2019년 6월에 무안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재각은 중국의 영양(潁陽)을 본관으로 둔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영모재이다. 1962년에 지어진 재각은 삼문을 갖춘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8개의 주련과 2개의 현판이 있다. 지금은 잡초에 묻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재각 앞에는 1974년에 세운 ‘학산천공보배창선비’가 있다.
또한, 마을에는 일제시기 학유정마을 제방이 막아지기 전에는 장부다리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현재의 장부다리휴게소에서 일로방면으로 하천을 따라 50m 정도 동쪽으로 들어오는 자리에 느티나무 거목과 연꽃이 심어진 논의 수로가 나오는 데 이곳에 ‘장부다리 선창’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부다리 옆에는 호화주택 단속이 한창일 때 전남 1호의 호화주택으로 지정되었던 별장형 주택이 있었으나, 흉가처럼 사람이 살지않고 있다가 5년 전에 철거되었다.
설화
당치마을의 앞에 있었던 중신기마을은 스님들이 새로 조성했던 마을인데, 이곳에 있었던 큰샘은 중들과 연관된 설화가 전해온다. 즉, 스님들이 탁발을 하면서 시주가 많이 되었으면 물이 넘치고, 시주가 안 되었으면 물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이 샘은 가을이 되면 언제나 샘물이 마르는데, 가을에는 스님들이 늘 탁발을 나가느라 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서 마른다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마을의 지형으로부터 비롯된 설화로는 말을 매는 말매봉, 칼처럼 생긴 칼봉, 산정상 바위가 투구모양인 투구봉을 거느리고 있는 장군봉과 관련된 설화도 전한다. 옛날에 한 장군이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승리를 하지 못하고 패해서 돌아오면서, 마계산에 말을 매어두고 질마재에 말안장을 벗어놓으며 칼봉에 칼을 내려두고 투구봉에 투구를 벗어 놓은 후, 삼향읍의 왕수산(중등포 뒷산, 왕산 또는 목포의 유달산)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전투에서 패했음을 고했다며, 이처럼 지명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의 형국이 그러하다는 묘한 풍수상의 해석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승달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의 중심을 가르며 흐르는 청계천을 살려서 친수공간으로 조성했으면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오랜 역사의 흔적이자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 장부다리의 역사적인 공간으로 조명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