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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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정 1리 청계면 강정마을 작성
  •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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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가구수 52세대, 인구수 82명이다.
자연마을 구성
강정1리인 강정마을은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북쪽 무안공항 방면으로 약 5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청계만이 펼쳐져 있으며 뒤로는 도대봉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주산인 도대봉(또는 고림산)을 중심으로 바깥쪽 바닷가에 자리한 마을로써 나주정씨 집성촌이었다.
지명유래
‘원강정’이라고도 부르는 강정(江亭)이라는 지명은 《마을유래지》에 나온 것처럼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정자가 있다.’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강정마을 앞에 있는 서해의 바다가 ‘홀통’으로부터 삼향 ‘왕산’까지 바깥의 섬으로 둘러싸인 내해로써 ‘무안강’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이는 또한, 강정마을의 입향조인 정덕주(丁德周) 공이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가 ‘호은(湖隱)’으로, 공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바다를 ‘인천강(仁川湖)’ 곧 인자하게 흐르는 호수와 같은 강으로 보았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강정이라는 마을의 지명이 생겼음을 나주정씨 대동보를 근거로 추정할 수 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1600년대 중반 압해에 살던 나주정씨 정사춘(丁泗春)의 아들 덕주와 덕용이 고림산으로 부르는 현재의 도대봉 아래로 이주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정덕주(丁德周, 1625-1706, 자-子聖, 호-湖隱)는 지금의 강정마을로, 정덕용(丁德容, 1644-1705, 자-자용, 호-윤재)는 태천마을로 옮겨서 각각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나주정씨의 집성촌으로 강정이 큰집, 태천이 작은집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강정마을의 입향조가 된 정덕주 공은 효종(孝宗) 2년, 1651년 별시 무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했으나, 이에 별다른 뜻이 없어서 일찍 그만두고 귀향하여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정자를 짓고 후손들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에는 장씨들이 터를 잡았다고 하는 ‘성주께’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또한 같은 나주정씨인 정우효(자-여효, 호-성암, 1533~1578)가 그 이전에 입향했다고도 한다. 참고로 성암의 형님인 정영효(丁榮孝, 자-성미, 호-의암, 1531-1575)는 몽탄면 양장리 도림산마을로 같은 시기에 입향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강정마을의 지형은 뒤편으로 도대봉을 두고 앞으로는 무안강 또는 인천강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도해의 섬들이 바깥 띠를 둘러서 안온한 서해의 안쪽 바다인 내해를 바라보는 배산임수형이다. 예전에 봉수를 올렸기에 봉수산이라고도 부르는 도대봉 곧 고림산(183.3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무안의 보평산으로부터 삼향의 왕산까지 위 아래로 펼쳐진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보이는 명산이다.
마을성씨
예전에 나주정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모여서 사는 혼합성씨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은 원래 1789년의 《호구총서》에 일서면 ‘오태천(五台川)’으로 나오며, 강정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2년에 자료에서 일서면 강정리, 태천리로 분구되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육지보다는 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명이면서, 동시에 무안의 ‘서강(西江)’ 또는 ‘무안강’이나 ‘인천강’이라고 부를 정도로 내륙에 임한 하천 같은 바다였으며, 여기의 중심에 위치한 강정마을에서는 이를 지명으로 붙였음을 알 수 있다.
행정구역 변경
강정마을의 행정구역은 1789년의 《호구총서》를 참조하면, 역사적으로 무안군 일서면 지역에 속했으나 잠시 1910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목포부로 옮겨져서 1912년에 일서면 강정리, 태천리로 정리된다. 그 후 1914년에 태천, 개꼬리마을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을 포함한 청계만 지역은 따뜻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남도에서는 제주도와 고흥 다음으로 빨리 양파가 출하되며, 무안의 여러 지역 내에서도 가장 먼저 생물이 열매를 맺는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서리가 가장 늦게 오는 마을이라고 한다. 주변에서는 고구마나 호박이 서리를 맞아 전부 시들해졌는데도 이 마을만은 싱싱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서는 무안의 대표적 특산물인 ‘무안양파’를 60여 년 전부터 일찍이 재배해왔다. 청계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돈을 예금하고 사는 마을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흔한 말로 주민 간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문헌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학문을 즐겨 했던 마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라의 격변기에 다른 마을은 여러 손해를 입기도 했지만, 이 마을에서는 피해가 전연 없었다. 또한, 서해안으로 기우는 낙조가 일품이어서 사진 애호가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면서 동시에 최근 도회지의 이주민들이 새로운 주택을 지어서 이거를 해오고 있는 경우가 늘었다. 그리고 청계만의 자연생태 환경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어 마을 앞에서 잡히는 운저리와 숭어 등의 어획량이 많이 늘었다.
주요시설
천주교성당(공소)
마을변화
수려한 풍광은 물론 고림산 주변의 농경지와 마을 앞에 펼쳐진 갯벌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해왔던 마을이어서, 학문은 물론 사물놀이와 연극인 등 예능인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하지만 최근 여타의 시골 마을과 같이 인구소멸의 위기로 연로한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다행히, 수려한 풍광에 살기 좋은 기후 및 환경 등으로 도시민의 유입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물론 주민들과 융합할 수 있는 마을의 기반시설 및 프로세스의 구축이 요구된다. 최근 마을사업으로 낙조대를 만들고 담장에 마을벽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일들을 추진하고 있으나, 향후 좀 더 세심하고 확장된 마을사업들이 요구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건강관리실(사우나), 낙조전망대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세발낙지, 새우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중앙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복개를 하여 골목길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중간에 공동샘이 있는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여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지하수의 활발한 개발로 예전과는 다르게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강정마을 앞의 바다는 ‘무안강’, ‘인천강’이라고 부르듯이, 앞에는 운남반도 그리고 그 앞으로 고이도 등 많은 섬이 겹겹이 둘러싸고 큰 바다에서 오는 각종 태풍, 해일, 너울 등을 막아주는 안온한 바다이다. 그만큼 사람이나 동물을 비롯한 식물들에까지 친화적인 강이나 호수 같은 바다로 자연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동/식물
마을 뒤에 둘레 4m가 넘는 당산나무가 있다. 입향조가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나무로, 마을이 형성될 때는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위쪽의 당산나무 주위에서 마을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마을 앞에 펼쳐진 갯벌에는 낙지, 새우, 조개를 비롯한 각종 ‘갯것’들이 풍성하며, 계절마다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온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당바위, 여시바위, 병풍바위, 주룡바위, 꽁에바위(천주교 공소 옆에 꿩처럼 생긴 바위) 절골, 복넘, 성주께(장씨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터), 염밭, 덩석골, 서당개, 관음골 등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주산인 고림산에는 정상에서 조선시대 봉화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다. 현재는 봉수대도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날이면 이 산은 만남과 놀이의 장소였다. 남자들은 봉화대 주변의 돌을 산 아래로 굴리고, 부녀자들은 주변을 돌며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즐겼다. 또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얼마 전까지 정월보름이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굿과 샘굿, 거리굿 등을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유물, 유적
예전에 봉수를 올렸기에 봉수산이라고도 부르는 도대봉의 고림산(183.3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무안의 보평산으로부터 삼향의 왕산까지 펼쳐진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보이는 명산이다. ‘고림산 봉수 유적’은 2023년 11월에 국가지정유산으로 선정되었다. 1953년 4월에 정이진 선생에 의해서 마을에 정착된 ‘천주교 공소’는 원래 4칸짜리 서당이 있었던 자리다. 천주교 공소 앞에는 예전에 초분이 많이 있었던 터였으며, 마을 앞 간척지는 1960년대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새우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선돌’과 1992년에 세워진 ‘도로포장사실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정홍식(가수), 정점순(국악인), 정옥례(가수), 정대진(꽹과리 풍물)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정해양(국악원장), 정진(서울시의원), 정민홍(초대 군의원)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일제강점기 때 이금자라는 사람이 금광을 찾기 위해 두 개의 굴을 뚫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마을 앞 바닷가뿐 아니라 고림산에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의 자랑거리는 무엇보다도 최근 마을사업으로 설치된 ‘석조대’에서 바라보는 노을의 풍경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진 애호가들과 관광객들이 몰리는 강정리는, 목포에서 약 20분, 광주에서 약 40분 정도의 거리인데다가 인근 무안국제공항에서는 5분 정도의 거리이기 때문에 접근하기 쉬운 입지 조건을 지녔다. 또한, 강정마을은 멀리서 보면 고림산 등성이에 자리한 가파르고 협소한 마을로 보인다. 앞에는 바다이고 뒤에는 산에 붙어서 마치 도시의 달동네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넓은 동네의 내면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면 한 편의 시가 저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경관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유당농장’이 들어서면서 청계만의 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에 우려를 많이 하고 있다. 마을 앞이 바로 바다이어서 삶의 터전이기도 한데, 수산자원 고갈이 현저하게 이뤄질 뿐만 아니라 기형고기들까지 많이 잡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더구나 가까운 도대리는 보상을 많이 받았지만 강정리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해서 피해가 심하다고 주민들이 하소연한다. 또한, 마을사업으로 설치된 ‘석조대’를 비롯하여 최근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고림산 봉수 유적’, 그리고 올해 70주년을 맞이하는 ‘천주교 공소’ 등을 홍보하고 활성화하는 지원과 연대가 절실하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현재 2022에 시작되어 2026년 준공 예정인 호남선KTX신선을 중심으로 무안공항역 및 인접도로 건설 등으로 지가가 많이 상승했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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