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망운면 무안국제공항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망덕산을 주산으로 오른쪽으로는 박달봉, 깃대봉이 있고 왼쪽으로는 우두산이 있다. 소쿠리 형국의 마을로 도대로가 지나고 있으며 창포만 간척지와 접하고 있다. 현재 벌포(서호정), 신기, 기동, 연수동 등 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속한 서호2리 신기마을은 개들, 버든들, 신기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호1리 벌포마을과 경계하여 무안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 창포만 갯벌에서 낙지, 석화, 게 등 풍부한 해산물을 잡아서 생활하던 어촌마을이었으나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서호4리의 연수동, 새터마을과 한마을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서호2리 신기(新基)마을은 문자 그대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도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여 ’신기‘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서호4리에 또 ‘새터마을’이 있어서, 같은 행정구역안에 한자와 한글로 같은 뜻을 가진 마을이 있어서 혼란스럽다. 지난 조사에서도 여러 주민이나 관계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지칭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어떤 장소의 지명을 붙임에 있어 조상의 전통적인 사고와 의지 또는 자연지형이나 생활모습 등 우리 문화의 역사와 가치를 담아내던 귀중한 문화유산이자 전달 행위로서의 지명을 정하는 게 아니라, 현세에 들어오면서 행정담당자들의 편의에 의해서 무작위로 양산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면 단위 이상의 지명은 기관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널리 쓰여짐에 따라 한자음이나 차별화된 지명으로 통일되어 가는 경향이 있으나, 자연마을 단위의 소지명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우리말 지명과 한자음 지명이 섞여 쓰고 있어 혼란을 빚고 있는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하겠다. 서호2리의 ‘신기’와 ‘새터’만이 아니라 무안 곳곳에 ‘신기’마을이 엄존하고 있는 현실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담양 홍암리에서 세거하던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이대수(李大守, 족보명–이세수(李世秀, 생몰연도 미상)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거지를 떠나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 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외손 등 타성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있는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참고로 청계면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는 대부분 완풍대군파의 후손들인데, 원래는 입향조가 마을 뒤 뒷봉 아래 쇠머리밭(우두전)이라고 부르는 곳에 정착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의 지형이 소머리형국이라 동물의 머리에 돌이나 무거운 것을 놓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터를 정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앞으로 창포만 갯벌을 두고 뒤로는 큰뒷봉과 작은뒷봉이 있는데, 작은뒷봉이 우두산(牛頭山)으로 소머리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지형의 형태가 소의 머리를 닮은 마을의 형국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소를 식구처럼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은 물론 12가지 명당 중에 하나로 소의 형상이 포함된 것과 관련이 있다. 소는 풍요와 평안, 그리고 힘이 있으면서도 유순한 장점을 갖춘 짐승으로 새로 마을의 터를 잡으면서도 이를 고려한 신기마을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 근본은 물론 소의 머리인 우두산 아래로 펼쳐진 버든들, 개들 등의 소머리밭에서 성실하게 일해서 편안히 먹고사는 사람들의 유순하면서도 질긴 인품과 어울린 인문지리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마을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신기마을이 보이지 않으며,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무안군 이서면 신기동(新基洞)이 처음 나타난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청계면 서호리 신기동으로 나오고, 1987년의 자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와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주민들은 ‘원신기’로도 불렀다고 한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는데 1910년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동, 연수동, 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청계면으로 보면 북부 쪽으로 낮은 산을 뒤로 두고 바닷가에 접해 있어서 춥고 바람이 많다. 다른 곳보다 기온이 2~3도 정도 낮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풍부한 갯벌 덕택에 비교적 여유롭게 살았으나 창포만 간척 이후로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근면하고 성실한 주민들의 성격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또한 무안읍, 운남면, 청계면, 망운면 등 4개 읍면이 다 보이는 곳으로써 조망상으로 보면 사통팔달의 요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바다를 막기 전에는 사실 오지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교통이 좋아지고 살기도 좋아졌다.
주요시설
서호교회
마을변화
원래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던 어촌마을로 창포만 넓은 갯벌에서 낙지, 석화, 게 등 어로작업을 통해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는 않게 살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사실 무안낙지라는 명성은 뻘이 찰지고 기름져서 낙지발이 길고 식감이 좋은 창포에서 잡힌 낙지를 말한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데 창포만이 간척지로 막히면서 갯벌을 농경지로 증명할 수가 없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주민들이 어려움을 크게 겪었다.
또한, 얼마 전까지 서호4리의 연수동, 새터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되어 온전한 상황이 아닌 듯하였다. 그래서 분리되기 이전처럼 모든 마을이 함께 모여서 동계를 같이 치루었다. 물론 지금은 마을별로 동계를 분리되어 치루지만, 마을의 공동행사나 잔치가 있을 때는 같이 어울린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청년회(서호1, 2, 3, 4리 합동)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동각(유산정)
전통식품/특산품
온도가 낮은 곳에서만 자라는 만생양파, 마늘, 벼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창포 간척지가 막히기 전까지는 이 마을 앞으로 밀물과 썰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어서 풍요로운 자연환경이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갯벌과 바다에서 나오는 각종 해산물을 잡아서 생활하였다. 특히, 죽방처럼 고기를 가둬서 잡는 이 마을 특유의 고기잡이법인 ‘벅커리’ 같은 전통 어업법은 충분히 발굴되어 보존될 필요가 있다.
또한, 바닷가 갯벌에 면하여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우두산을 비롯한 마을에는 수많은 바위가 있었다. 그중에서 ‘구수바위’에는 천연 약수터가 조성되어 많은 사람이 해수찜을 하러 오던 곳이다. 이러한 해수찜은 뜨겁게 돌을 달궈서 바닷물에 넣어서 물을 데운 뒤 목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월에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관을 돌이나 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서 덮어두는 것을 초분(草墳)이라고 하는 데, 이와 비슷한 형태의 바위인 ‘초분바위’가 있었다.
동/식물
원래 갯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갯벌생물은 물론 이들을 먹이로 찾아서 날아오는 새들도 많았는데, 특히 계절에 따라서 수많은 철새가 날아와서 장관을 이루었다. 또한, 갯벌에 접한 이 마을에서는 깔따구가 너무 많아서 잠시만 서 있어도 시커멓게 달라붙었다고 한다. 깔따구는 대체로 해안가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유독 이 마을에서 심하였다. 그런데 마을 앞의 바다가 막히면서 농경지가 되어 농약을 많이 뿌리기 때문인지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마을 동쪽에 30미터 높이의 낮은 산이 있고, 이 산의 동쪽 사면 말단부와 신기마을 사이에 유물산포지가 있어서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후 발굴자료에 대한 확인과 함께 세밀한 조사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동계책이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동계책은 1942년부터의 자료인데, 마을의 변천과정과 내용 등이 자세하게 담겨 있어서 마을연구에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리라고 예상된다.
또한, 예전 마을조사에서 채록했던 동학 관련 자료가 있다. 당시 마을의 이금동 씨 댁 초가의 용머리에서 천도교 관련 서적들이 나왔으나, 당시 천도교 관련하여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없앴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 한 분에게 “마을에서 72명이 동학 관련으로 죽었다.”라는 내용을 채록하여, 동학군의 집강소가 있었던 청천리와 연결된 주요 이동로인 신기마을의 동학 관련 연관성을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