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3리에 속하는 기동마을은 무안 방향의 도대로에서 서호1리인 벌포마을에 이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소쿠리 형국의 마을이다. 뒤로는 낮지만 전망이 좋은 차일봉(106.3m)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서호저수지가 있으며, 마을회관 근처에는 천주교 기동성당을 두고 40여 세대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지명유래
기동(基洞)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서호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로 텃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마을조사에서는 ‘지리적 위치 등을 제외하고 입향조만을 봤을 때는 서호1리에서 분가한 마을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이서면 기동리로 이름이 기록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점과 아울러, 텃골이라는 지명처럼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거주했던 흔적들인 각종 유물, 유적은 물론 선돌과 고인돌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는 충분히 재고의 여지가 큰 것으로 여겨졌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입향조는 호동(虎洞, 경기도 용인에 있던 마을로 추정)에 살던 고성김씨 김안태라는 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성김씨 족보에서 입향조를 확인할 수 없었고,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뒤이어서 들어온 성씨가 나주정씨이며 이어서 나주오씨, 이천서씨, 압해정씨의 순으로 입향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나주오씨는 없고 나주정씨의 정시중(鄭時重) 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서남해안에서 왜적을 막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월탄 정기수의 손자로 서호정마을의 입향조인 정신(鄭申)의 넷째 아들이기도 하다.
이를 통하여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부친 정기수 장군을 추모하려고 창포만이 바라보이는 서호1리 벌포마을에 입향한 정신(鄭申)의 아들인 정시중이 그 이후에 분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정씨역대인물록에 의하면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된 것으로 확인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기동마을을 아늑하게 감싸안고 있는 차일봉은 마치 ‘차일을 쳐놓은 것처럼 보인다.’라고 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마을의 뒷산을 말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덕을 베푼다. 또는 덕이 있는 산이다.’라는 뜻으로 망덕산(望德山)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실제로 나라나 지역에 변란이 있을 때 주변 마을에서는 큰 피해를 보고 했는데, 이 산 주위에 있는 주민들이나 이 마을로 몸을 피한 이들의 경우에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이 마을을 피난지로 부르기도 했다.
망덕산이 좋은 산임을 말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옛날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때에 마침 마을 앞을 지나던 고창정씨가 갑자기 운명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족들이 주변을 살펴봤으나 마땅히 묘를 쓸만한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마을 뒤의 망덕산을 바라보니 눈이 쌓이지 않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유해를 모셨다. 그런데 그곳이 명당이었는지 묘를 쓴 다음 해부터 고창정씨의 후손들이 잘되었다. 과거 급제자도 나오고 후손들이 발복하여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그곳을 망덕산의 명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마을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기동리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서는 무안군 이서면 기동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청계면 서호리 기동으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서 청계면 서호리 기동으로 나와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는데 1910년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동, 연수동, 기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 주민들은 주변의 부드러운 산세를 닮아서 성정이 모두 착한 모습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부가 함께 90세 이상 장수를 누리는 세대도 있었던 것으로, 지난 마을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서 주요한 시설로는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천주교 기동성당으로 1952년에 설립된 천주교 공소이다. 참고로 이웃마을인 강정마을 공소는 1953년에 세웠다. 그렇듯이 역사가 오래된 이 공소는 무안의 천주교 성지인 몽탄면 사내마을에 살고 있던 김우길 씨의 영향으로 세워졌다. 주민들 중 대부분이 신자로써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청년회(서호1, 2, 3, 4리 합동)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풋마늘,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포근하고 부드러워서 친화적인 망덕산에 최근 마을 등산로가 만들어졌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묏골, 뒷골, 범호골, 비석골, 안터, 고래, 너더리, 큰세정이, 작은세정이, 건넌골, 독정골, 선덕골, 오총, 스당골, 건넷담, 솔매미, 맥동, 장승백이, 태밋재(태봉에서 넘어오는 고개)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이 산에서 정성스레 기우제를 지내면 하늘이 반드시 응답하여 비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오래전에 마지막으로 기우제를 지낼 때는 마침 이 부근에 있던 당시 국회의원인 박석무 씨가 제관이 되어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3일이 되면 망덕산을 향해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을기(旗)도 만들어 마을을 기념함은 물론 이를 통해 주민들 간의 단합을 위한 행사를 하고 있다.
유물, 유적
텃골이라는 지명처럼 오래 전부터 이 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안골이나 너매섬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토기와 조각’이나 ‘자기 파편’이 출토되어 주민들은 이곳에 절터였던 ‘절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청계면소재지로 나가는 길목에 ‘장승백이’라 부르는 곳에는 선돌이 서 있었으나 196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없어졌고, 마을 뒷산에는 고인돌 3기가 원형 그대로 놓여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나주정씨 재각인 ‘숭모재’가 있는데, 1985년에 지은 재각으로 삼문이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다. 안에는 나주정씨 입향조를 비롯하여 조상을 모신 신위가 대수별로 걸려있다.
이외에 기동성당 안에 마을에서 옮겨온 ‘연자방아’가 원형 그대로 놓여 있으며 종도 달려있다. 달바위에서 소로 바위를 끌어와 맷돌을 만들어 사용했었는데, 마을회관 앞에 묻혀있는 것을 회관 마당 공사 중에 발견하여 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다.
설화
마을에 ‘옥녀봉전설’이 있다. 선덕골이라고 부르는 곳에 옥녀봉이 있는데, 그 앞에는 ‘옥녀가 옥녀봉에서 저수지를 거울삼아 머리를 빗고 있는 형국’이라는 저수지가 있다. 또한 저수지 앞으로는 거문고등이 있으며 옥녀봉 뒤로는 방구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두 사람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일류대학에 진학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