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리는 광주-목포간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낮은 구릉지대로, 승달산의 사자바위산(315m)에서 시작한 골짜기가 흘러내린 모양새의 마을이다. 여기에서 청수2리에 속하는 상작천은 까꿀봉 아래의 까치내(上鵲川)와 뒷재봉 아래의 제비내(燕川) 그리고 남안동 앞산 아래의 덕골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상작천은 마을의 형국이 까치와 제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멀리서 보면 이 마을 주변이 제비를 사이에 두고 한 쌍의 까치가 의좋게 자리 잡은 형국인데, 윗마을을 상작천이라 부르고, 아랫마을인 남안3리 상천동 주변의 마을을 하작천이라고 불렀다. 까치내와 제비내를 합쳐서 작연(鵲燕)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곧 까치와 제비가 서로 어울려 사는 마을을 뜻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 않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1586년 진주강씨 강장자라는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른 아침 까치 소리를 듣고 까치둥우리 밑에 집을 짓고 정착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에 본관을 압해도로 하는 압해김씨의 후손들이 외얏골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한다. 압해김씨의 시조 김회경(金會景)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둘째아들로 나주김씨의 분파인 김굉의 6세손으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압해(押海)로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후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아서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현재 이 마을에는 김해김씨, 무안박씨, 문화류씨, 달성배씨 등 복합성씨들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상작천마을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까꿀봉과 뒷재봉, 남안동 앞산으로 둘러싸여 소쿠리형국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소쿠리형국’은 소쿠리 곧 바구니 모양을 닮은 지형을 의미한다. 이 형국은 소쿠리처럼 생긴 지형이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모아준다고 여겨지며, 주로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 기운이 모여드는 명당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태봉천은 마협봉의 큰 줄기에서 많은 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상당히 큰 하천인데, 그런데 드물게도 이 하천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새들이 찾아들었고, 이 태봉천을 중심으로 주변 마을에 새와 관련 이름의 지명이 많다. 송현리 솔치마을의 솔개, 상작천의 까치, 연천의 제비, 남안동의 기러기가 그것이다. 물론 현재의 태봉천은 좁은 수로가 되었고 또한, 물길 역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만이 순리는 아닌 세상이 되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명칭이 처음 기록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작천리로 나오며,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이서면 상작천과 하작천, 연천리 등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청수리 연천리, 월곡리, 상작천 등으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와 같이 청계면 청수리 상작천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나주부 무안현 이서방에 속했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이서면으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이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일서면(46개리), 이서면(22개리), 삼향면 대치,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지형적으로 승달산과 바닷가에 인접한 마을에는 전통적인 농사를 짓는 사람은 물론 어업과 상업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어느 마을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난 마을조사 당시만 해도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볼 수 있어서 주민들의 자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계면에서 가장 낙후된 마을이었는데 주민들의 부지런함과 단합된 힘으로 오늘날에는 청계면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마을회관(민화수업 등을 진행함)
마을변화
앞마을에 청계농공단지를 접하고 있는 배후의 주거 마을로써 새로운 전원주택들의 건립은 물론 각종 특용작물 재배 등 다양한 주민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온 마을에서 가마터가 발견되는 역사성에 기반하여 무안도자산업특구를 조성하는 사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마을 발전의 계기를 맞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맨발걷기시설(마을하우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외얏골 주위로 이어진 ‘바둑산’의 골짜기와 접해있는 이 마을에도 온통 마을 전체가 도자기 산지였다는 듯이 각종 가마터의 흔적과 도자기 파편들이 나오고 있다. 마을 주변의 밭이나 산에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파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외얏골에는 도요지와 기와공장이 있었으며, 이웃마을인 청수동과 신흥동에서도 많은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서호리 연수동에서 질좋은 점토가 발견되었고 청계2농공단지 공사장에서는 넓게 퍼진 백토층의 광맥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흥동과 마찬가지로 상작촌에도 마을 앞으로는 거대한 석회층의 수맥(水脈)이 지나고 있어 가끔 지반이 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에는 따스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지만 이 물에는 석회성분이 많아서 소들에게 먹이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물을 먹고 자란 소들은 성격이 난폭해지고 사나워지기 때문이었다. 덕골 앞에 ‘감샘’이라는 샘은 무안의 못샘 못지 않은 수량과 맛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상수도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식물
마을에는 앞의 선돌과 같이 또는 해풍을 막던 우실과 같이 나무숲을 활용하여 액막이 구실을 했던 시설물이 있었다. 이른바 ‘섬등’이라 불리는 7개의 흙으로 된 동산이 마을 앞에 있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가죽나무 등이 심겨 있는 섬등은 마을 앞 농경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모두 없어져 버렸다. 아랫마을인 상천동에 칠성바위가 있었고, 한국지명총람에 남안리 부근의 칠성동이란 지명이 있는 것을 보면 칠성신앙과 관련되어 보이나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을 둘러싸고 외얏골, 까골, 강당골, 덕골 등 4개의 큰 골짜기가 있다. 외얏골은 현재 청계농공단지가 들어있는 자리로 예전의 이곳은 도요지와 기와공장이 있었던 자리이며, 까골은 마을 뒤 골짜기로 주변에 교회묘지 등이 있다. 강당골은 무안박씨 제각을 강당으로 부르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제비내 아래에 덕골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주변 세 군데의 고인돌이 있었지만, 한 군데는 밭을 경작하면서 없어져 버리고, 제비내 마을을 포함한 두 군데에 각각 두 개씩의 고인돌이 남아있다.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이 마을에 유적과 유물이 마을 주변에 넓게 산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마을 뒷산에서 북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구릉부의 사면부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옹관 및 회청색 경질토기편 그리고 석부등이 수습되었다. 이곳은 과거에 해안선과 맞닿은 곳으로 범아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2005년에 준공된 정씨제각인 ‘청율재’와 그 뒤편의 김해김씨 제각, 무안박씨 제각인 ‘경모재’ 등 세 개의 제각이 있다. 그리고 주민들이 선독골 옆을 ‘솔대배미’라고 하는데, 솔대배미는 조선시대에 마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나오면, 그를 자랑하기 위해서 특별한 표시를 하며 기념하던 자리라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민화선생님:이옥연(60세)님
고향은 부산,천연염색,민화,공예를하신분. 직장관계로 연고도없는 목포로왔다가 퇴직후 평생할 수있는 일을찾다가 상작촌으로 들어옴.2023년부터 재능기부로 주민들에게 민화를 시작해서 23~24년에 전주,보성공모전에 다수의 주민들이 특선과 입선으로 좋은 결과를 얻고 24년2월 승달에서 3월에는 남악도립도서관에서 그림전시회로 성황리에마침.
박정수이장님이 평생교육강사로 신청을 해줘서
25년 3월부터는 강사료를 받게 되었다고 함.
주민들은 평생붓을 잡아보지못했는데 이제는 밭일을 하는데도 그림이그려지는생각이든다고 하심.농번기때는 마을회관에서 밤을 이용하며 주민들의 형편에 맞는 수업을 진행하는데 주민들의 화합과 소통이 잘되는 행복하고 즐거운 마을이라고 자랑이 대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