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용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km에 위치한다. 남쪽에는 학두봉 서쪽으로는 강정리와 차일봉 동으로는 천마산과 태봉산을 접하고 있다.
복용리는 용수동과 대곡동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는데, 복용이란 지명은 지형이 용이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여기에서 용수동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공항로를 타고서 약 4km가량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만나는 마을로 복룡1리에 해당한다. 복룡1리는 장자산, 용수동, 복룡동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용수동 마을 뒤쪽으로 속칭 방구봉이라고 부르는 차일의 맥을 받은 참삯골(또는 참새골)이 있고, 앞으로는 부소산(또는 부섬산, 학두봉)과 장자산 마을 건너에 태봉산이 펼쳐져 있다. 이에, 용수동은 《무안군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지형이 용의 형상과 같아서 붙인 이름이며 그 외 “참삯골, 개꼬리”라고도 부른다.’라고 하였으나, 용과 관련된 지명은 복용리의 용을 따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이 마을은 원래 ‘초분골’이었으며, 강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고 ‘탐진최씨’들이 들어와 터를 잡았다.
복룡은 예전에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와 차일봉의 맥이 물을 향해 뻗어 있어서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주민이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예전에는 마을 옆에 있는 옹기가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장자산은 산 이름처럼 보이는 마을이름이다. 마을 뒤에는 풍수적으로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 하늘을 나는 말이 바람을 가르며 길게 우는 형세)의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뜻의 천마(天馬)라는 지명을 갖는 산이었다. 주민들은 산재라고도 부른다.
마을형성(입향조)
용수동 마을의 입향조는 탐진최씨 최태현(崔泰賢, 자-태경, 호-송파 1741~?)으로, 증직인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표해록을 지었던 금남 최부 선생의 후예다. 집안 대대로 나주에서 세거하다가 1728년 무신역변(戊申逆變, 일명 이인좌의 난)에 몸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 공은 초야에 묻혀 명리를 탐하지 않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진실하게 사귀어서 가문을 일으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탐진최씨 성지공파 족보를 보면 이 마을 입향조와 무신역변과의 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장자산 마을은 원래 임씨들의 세거지였다. 임장자 터라고 알려질 정도로 임씨들이 부를 이루며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마을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복용리는 남쪽으로 학두봉, 서쪽으로 강정리와 차일봉, 동으로는 천마산과 태봉산을 접하고 있는 지형이어서, 마치 ‘용이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므로 복룡(伏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성씨
현재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일서면 장자산과 복용촌으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일서면 장재산, 대곡리로 나온다. 1914년엔 청계면 복룡리 복룡동, 용수동, 장재산, 대곡으로 나오며, 이후 같은 이름으로 나온다.
그렇듯이 1789년의 《호구총수》와 1912년의 자료까지 용수동과 복룡마을이 나오지 않고, 1917년 자료에 이르러서야 장재산과 함께 용수동과 복룡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들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긴 마을로 지난 마을조사에서 추정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나주부 무안군 일서방에 속하였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일서면에 속했다. 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잠시 목포부 일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일서면(46개리), 이서면(22개리), 삼향면 대치,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 무안군에 편입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청계면 내에서 바닷가에 있는 강정리와 승달산 자락에 있는 청천리 사이에 있는, 비교적 낮은 구릉지이면서 물이 좋은 평야 지대로 농사를 주로 지으며, 맛이 좋은 쌀(米質)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지금은 양파, 마늘, 오이, 호박 등 다양한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으며, 그렇듯이 주민들의 성품이 온후하고 예의 발라서 서로 화합하며 살고 있다.
주요시설
복용교회
마을변화
젊은 세대 인구가 빠져나가고 또한 마을 양옆으로 광-목간 도로와 무안국제공항으로 이어진 815번 도로가 지나가면서, 도심지 배후의 어정쩡한 마을로 비치고 있지만, 여타 마을과 달리 주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전통 마을로서의 특성을 지키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집하장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오이, 감, 기능성 미니 단호박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는 ‘들샘’이라는 아주 유명한 샘이 있었다. 이른바 무안의 수맥으로 3대 샘을 말한다. 즉 무안읍 중사지의 ‘못샘’과 청계면 청수리의 ‘밤샘’ 그리고 이곳의 ‘들샘’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없어져 버렸지만, 지리상으로 보면 이 세 개의 샘들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결된 샘 줄기는 청계면 남성리를 거쳐 복길2리로 빠진다. 현재 ‘들샘’은 메워져 농지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뒤에는 1967년, 1968년 대한해(大旱害) 이후 밀가루 사업으로 축조된 복룡저수지가 있다. 지금은 연방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물길 때문인지 용수동 마을에도 ‘옥녀샘’이 있으며 이와 관련한 지형설화도 전한다. 옥녀샘이 위치한 곳이 두 산줄기의 가운데 있어 마치 여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샘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남자의 성기를 닮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 두 봉우리가 서로 견제해서 이 마을 사람들은 연애를 잘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 거주하는 남자들의 수명이 다른 마을에 비해 짧은 것은 ‘옥녀샘’의 영향이 크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옥녀샘은 67년 68년의 큰 한해에도 마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맛이 좋아 상수도가 발달한 현재에도 주민들은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동/식물
오래전부터 마을회관 뒤에 당산목이었던 주염나무가 있었는데, 마을을 개발하면서 그 나무를 파서 없애버렸다. 그러자 아무런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어 나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주민들은 이러한 일이 당산나무를 없애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고 마을회관 앞에다 팽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마을 젊은이들의 변고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고깃배들이 고기를 저장했던 곳인 ‘고들배미’는 또한 주민들이 ‘고등어뱀’이라고 불렀다.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뒷골’, 장재산 옆에 있는 들판인 ‘띠밧매’, 용수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 ‘꾀꼬리 또는 개꼬리’라 하는곳에는 현재 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으며, 이 마을 앞에 마치 배처럼 생긴 ‘배바위’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국수댕잇재’라고 했으며, 뒤에 있는 고개를 ‘배바웃재’라고 했다. 장재산 뒤에 있는 산을 ‘산재’라고 했으며, 용수동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를 ‘새암’이라 하고, 장재산에서 송현리 솔치로 넘어가는 고개를 ‘싯갯재’라고 하며, 장재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오리굴’이라 한다. 지금은 공동묘지 터가 된 ‘억금재’와 ‘새쟁이’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 3기의 돌은 선독 또는 살맥이독이라고 한다. 모두 자연석으로 높이가 1m 20cm내외이며, 마을에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살맥이독에 제의행위를 행하지 않으며, 또한 지금도 장자산마을 주변에서는 청자 및 백자 조각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설화
예전에 100여 호가 넘는 세대수를 자랑했던 장자산마을에는 현재 겨우 예닐곱 가구만 살고 있는데, 이처럼 마을의 흥망성쇠와 관련한 ‘임장자전설’이 널리 알려져 전하고 있다. 지난 마을조사에서 채록된 전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자산에 ’임장자‘라 부르는 욕심이 많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태봉산의 큰 스님이 보낸 상좌가 이 마을로 시주하러 왔는데 임장자는 시주는 안 주고 사람을 귀찮게 한다며 오히려 스님을 헛간에 가두어 버렸다. 그 후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큰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접 임장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임장자에게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으면 자기 말을 따라서 시행하라고 했다. 즉, 마을 앞의 세 군데에 액맥이 돌을 세우고 갓난아기의 태를 태봉산에 묻으면 마을에서 대대로 부자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임장자는 자기만 부자가 되고 싶어서, 아무도 접근을 못하게 하고 오직 혼자만이 은밀하게 태봉산에 올라가서 아기의 태를 묻었다. 또한 액맥이 돌을 자기 집을 중심으로 삼아서 삼각형으로 세웠다. 그러나 임장자는 얼마 못 가서 그렇게도 많이 모아둔 재산이 점차 없어지고 폐가가 되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도 일가친척들도 뿔뿔이 흩어져 폐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김원규(완도경찰서장), 최재섭(면장, 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레미콘공장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1996년에 마을에서 정부보조금 5200만원, 주민부담금 2000만원으로 ‘오이 집하장’을 만들어 7년간 오이를 특산물로 이용하여 마을 소득을 올렸다. 지금은 이를 ‘양파 냉장고’로 사용하며 년 350만원 정도를 마을수입으로 올리고 있다. 또한, 마을에 있는 레미콘공장, 축산업체 등에서 마을행사 시 마을에 협조를 많이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