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용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km에 위치한다. 남쪽에는 학두봉 서쪽으로는 강정리와 차일봉 동으로는 천마산과 태봉산을 접하고 있다.
용수동과 대곡동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는데 복용이란 지명은 지형이 용이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복용2리인 대곡마을은 복용1리인 용수동마을 뒤쪽에 있는 신촌과 대곡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신촌은 소태골을 말하며 망맷재 밑으로 예전에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지명유래
대곡(大谷)은 복용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골짜기가 깊은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마을을 자세히 보면 속칭 솟대골이라고 부르는 소태골에서 솔치를 지나 상마리를 거쳐 도림리까지 이어지는 긴 골짜기를 이르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장자산마을로,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800년 전에 100호 이상 되는 김해김씨와 전주최씨 주민들이 장자산마을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이후 괴질병으로 마을이 폐촌 되었다. 이때 주민들 일부가 용수동 마을로 또 일부는 장자산마을 북쪽 골짜기로 이주했으며,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하였다.’라고 전한다.
즉, 300여 년 전에 장자산에서 일부 주민이 현재의 마을 뒤에 있는 동암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대곡마을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전씨(田氏)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살지 않고 묘만 일부 남아 있다. 이후 김해김씨와 문씨 그리고 최씨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김해김씨의 입향조는 김현주(金顯周, 자-군선, 호-선암, 영조대)로 나주 백구촌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이주해왔다. 예전에 이곳은 장자산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대부분 이 골짜기에 묻혀서 ‘초분골’로도 불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무안의 진산인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매봉의 줄기를 주봉으로 하고, 옆으로 천마시풍(天馬嘶風)의 혈처를 안고 있다는 천마산(장재산 마을에서는 산재라고도 한다)이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있다. 이러한 지형을 보면서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은 두 번이나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골짜기 입구에서 이 마을을 보며 좌청룡 우백호가 꽉 짜여 있어서 천하의 명당이 여기에 있다고 놀랐으며, 두 번째는 마을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마을로 산의 맥이 이어지지 않아 기운이 흩어짐을 보고 ‘아뿔싸!’하며 놀랐다고 한다. 스님이 아쉬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눈물바위’가 있다. 그렇듯이 마을의 지형은 소쿠리의 와우형(臥牛形)으로 큰 인물은 나지 않지만 먹고살 만한 지역이라고 주민들은 이해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은 이러한 천마산을 보고 ‘여수내산’ 또는 ‘여수내 까끔’이라고도 불렸다. 왜냐하면 여수에 사는 김씨들이 이 산의 혈처에 묘를 쓰고 여수 고을 원님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파묘를 해서 묘의 흔적이 없는데도 주변 마을의 어른들은 ‘여수내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명칭인 대곡은 이전에는 나오지 않다가 1912년의 자료에서 일서면 장재산, 대곡리가 처음 나오고, 1914년에 청계면 복룡리 복룡동, 용수동, 장재산, 대곡으로 나와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백제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나주부 무안군 일서방에 속하였으나, 1909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무안군 일서면에 속했다. 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잠시 목포부 일서면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일서면(46개리), 이서면(22개리), 삼향면 대치, 외읍면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개칭, 무안군에 편입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청계면에서 관동마을과 함께 미질(米質)이 좋은 쌀을 생산하여, 주변의 부자들이 이 마을과 관동마을의 쌀만 찧어다가 먹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물길이 좋아 모든 작물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의 시체는 잘 먹어서 무겁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서로 위하고 협조하여 큰 소리가 마을 밖을 넘어가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 때에도 마을에 단 한 사람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서로를 위하고 감싸 주었으며,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줘 넉넉한 인심을 자랑했다. 현재의 마을회관도 주민이 부지를 희사하여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화합하고 있다.
주요시설
‘제칠일안식일교회’가 들어서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선교 수단으로 마을에 학교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청계중앙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주변 마을의 아동들까지 이곳에서 배웠다. 지금도 주민들은 ‘예배학교’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으며 마을 뒤에 ‘학교당’이라는 지명이 마을에 남아 있다. 현재는 ‘대곡교회’가 들어섰다.
마을변화
예전의 마을조사에서 대곡마을을 두고 ‘종교와 관련이 깊은 골짜기가 긴 마을’이라고 했었다. 그렇듯이 이 마을에서는 6명의 목회자 등을 배출하면서 교회의 역사가 깊이 밴 곳이다. 현재의 대곡교회는 원래 큰길 옆에 있었던 대성교회가 전원교회와 나누어지면서 마을로 들어섰다. 이 교회에서 구남교회, 태천교회(강정 제일교회), 상천교회, 복용교회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처럼 교회의 역사가 깊지만, 현재 마을에는 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대신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뿌렁구마을>로 2016년 수련마을 대상을 받은 표지석이 서 있다. 또한, 2023년에는 전라남도에서 주관하는 ‘으뜸마을’로 선정되어 마을 공동쓰레기장과 전통문화인 물레방아 등을 만들어 우수상을 받으며 이듬해까지 연속 진행하였다.
앞에서 ‘자손 대대로 이어가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뿌렁구마을이라고 명명했듯이, 이 마을은 깨끗하고 청결함은 물론 이주 외국인들도 함께 어울려서 살아간다. 현재 태국 등에서 이주한 외국인이 두 채의 집을 지어서 사는데, 주변이 깔끔하고 채소를 심은 텃밭 등이 보기에 좋아서 주위에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동각.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긴 골짜기 형국이었던 마을에는 여러 바위가 많았다. 그중에 ‘각시바위’는 천마산에 있는 바위로서 반반한 바위에 두 개의 발자국과 소변을 봤던 자국이라고 하는 흔적 형태가 남아 있다. 주민들은 여장군이 군대를 지휘하여 올라가던 중 잠시 쉬면서 볼일을 봤던 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각시바위 위에는 ‘장군바위’와 ‘제비바위’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돌을 깨서 사방공사 등 도로 확장공사로 사용하였다. 또한, 마을의 유명한 ‘들샘’은 무안의 3대 샘 중 하나이다. 이른바 무안읍 중사지의 ‘못샘’과 청계면 청수리의 ‘밤샘’ 그리고 이곳의 ‘들샘’을 말한다. 지리상으로도 이 샘들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결된 샘 줄기는 청계 남성리를 거쳐 복길2리로 빠진다. 현재 ‘들샘’은 메워져 농지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 들샘 주변을 경지정리할 때 20여 개의 ‘확독’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산과 바위와 물 등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마을의 생태환경을 두고 주민들은 예로부터 ‘놀기 좋다 각시바위,/ 바람 잘 든다 진등재,/ 물 좋다 들샘골./’ 이라는 마을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절골, 참새골, 동암, 광대골, 진필, 매봉, 서당뫼, 불당골, 윗절골, 아랫절골.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 삼문이 있는 나주정씨 제각인 ‘효사재’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두 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그리고 이 제각 주변에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설화
마을 뒤에 ‘와우동’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진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 와우동에 묘를 써서 부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오래전에 한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마을 뒤에 있는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서 집에서 싸 온 감자와 개떡을 풀어놓고 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 바위를 보니 늙고 볼품없는 한 노인이 해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배고프고 피곤함에 지친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애야 저기 계시는 노인을 이리로 모셔 오너라”하고 손자를 보냈다. 손자가 노인을 모셔 오니 역시 굶주림에 지친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먹으려고 하였던 개떡과 감자를 노인에게 주며 “맛은 없지만, 얼추 요기는 될 겁니다. 잡수세요.” 먹을 걸 받은 노인은 게 눈 감추듯 다 먹었다. 그리고는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가 사흘을 굶었더니 앞뒤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하면서 인사치레를 했다. 그리고는 “제가 할머니께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가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텐데 맞춤한 묏자리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역시 할머니는 마음이 선해 복이 있으시군요. 마침 맞은편 보이는 오목한 곳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천마산의 영향을 받아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 후손들이 발복하겠습니다.”라며, 친절하게 묫자리를 잡아 주었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와우형에 묘를 쓰도록 신신당부하고 눈을 감았다. 이후 아들은 어머니의 당부대로 와우형인 곳에 묘를 써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일제강점기에 천도교의 종리사였던 김병화(김제창의 조부)는 전라도 지역의 중요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남아 있으며, 현대의 인물로는 김응권(전남상대 학장), 문창규(한국타이어 사장), 김중호(교장)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예전에 마을 앞으로는 큰 길이 있었다. 강정리나 상마리, 복길리, 남성리 일부에서 무안읍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의 왕래가 많아서 주막이 있었으며, 지형상으로 이루어진 오랜 길목이어서인지 고인돌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 많았던 고인돌은 사방사업과 도로 확장 등을 할 때 사용해서 현재는 나주정씨 제각 주변에 두 기의 고인돌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