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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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마 1리 청계면 상마정 작성
  • 상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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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의 세대수는 47세대이며, 총인수는 78명(남43, 여 35)이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상마정 마을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쯤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청계면 상마1리에 해당된다.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주민들은 뒷산인 상곡봉의 형태가 말의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랫마을인 하마정 사람들은 이른바 송감사의 이야기를 하며 말을 타고 내리는 의미의 지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마정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항이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나주정씨를 포함하여 전주 이씨와 광산 김씨였으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후손들이 없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최초 입향조는 상산 김씨 김선호로 인조(1623-1649)때 나주 삼도면에서 세거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 그 뒤 효종(1649-1659) 때 진주 강씨 姜春周가 영광 백수에서 살다가 토지가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서 마을의 상산 김씨 댁을 찾아 김선호라는 선조가 있었는지 물어보았으나 모르고 있었으며 건네 준 족보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마을 옆의 독배기란 곳에 모셔져 있는 ‘김중철(자-중길. 1633-1693)’이란 선조가 이 마을 상산 김씨의 입향조라고 한다. 하지만 상산김씨 문중에서는 김중철의 아버지인 김태선(자-광화. 1594-1648)이 무안에 최초 입향하였는데 그 입향지가 상마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진주 강씨 입향조로 알려져 있는 강춘주는 문중의 족보와 향교지에도 나타나 있다. 향교지의 기록에 따르면 ‘강춘주(호-南隱, 1631년생)는 조선 초기 뛰어난 文臣이었던 강희맹의 후손이다. 그는 영광군 백수면 주교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1600년대 중반에 청계면 상마리 사마정으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공은 가문을 엄히 다스리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孝와 友 두 字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니 주변 사람들이 遯世 逸民이라 칭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김, 강, 성산김씨등 혼합 성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지금의 한자와 다른 上마田 下마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上馬田리 下馬리로 나오다 1987년에는 지금처럼 상마정 하마정으로 표기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늘, 양파, 깨, 고추, 벼, 친환경블러커리(개인)를 재배하고 있으며 양파를 주로 많이 생상하고 있다.
주요시설
소망교회가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를 비롯하여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가 조직운영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 회관과 마을앞 정자가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 처음 들어가 보면 마을이 상곡봉을 주산으로 해서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아늑함과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마을 앞에는 67 - 68년 大旱害를 겪고 나서 축조했다는 상마 저수지가 있다. 조그마한 저수지인데 마을 앞 농경지의 농업용수로 쓰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동/식물
당산나무가 서 있는데 둘레가 3미터 이상이나 되고 수령이 300여년이 넘음직한 나무이다. 주변에서 보기 드문 괴목 나무로 나무의 한쪽 부분이 화석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정월 보름이면 이 당산나무에 제상을 차려놓고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한국지명총람에는 ‘마을에 강씨들이 살았다고 하는 강가울이 있었고, 마을에서 강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꼬리 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목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병목잿 골이라 한다. 또 남아있는 지명으로 윗골, 금스렁골, 구스배미, 통배미 등의 이름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부년회가 중심이 되어 년 1회 마을 주민 전체 관광 여행을 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서는 돌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있다. 마을 앞 정자 옆에 있는 입석은 길이 2미터 30, 둘레 1미터 60의 크기인데 오래 전에 마을에 전염병 등 횡액을 막기 위해서 세워진 돌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 마을 앞 논을 경지정리하면서 입석을 건드려 넘어지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입석을 방치해두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석을 건드렸던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急死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환이 자주 일어나 주민들은 입석이 넘어져서 오는 일이라 여기고 입석을 다시 세워 놓았다. 그 이후부터는 마을에 불상사들이 없어졌다고 한다.마을입구 30cm전방의 도로좌측에 입석 1기,높이135cm,폭과두께 55cm×27cm, 입석동북쪽70m에 지석묘군이 위치한다. 그곳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인돌이 11(16기)개가 발견되었는데 묘지 주변에 묻혀 있는 고인돌도 보이고 있어 더 많은 고인돌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석묘의 굄돌 중에서 길이가 2미터 60이 넘는 돌도 있었다. 독배기 뒤에는 비닐재생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도청에서 공항까지 가는 4차선 도로 공사를 완공하여 운영중에 있어 독배기는 없어졌고 비닐공장도 없어졌다.
설화
이 마을에서 구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병목재라 한다. 마치 병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재에는 ‘병마개’라 부르는 넓은 돌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부근에서 공사하면서 돌을 움직여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자 그 때부터 마을 주민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해를 봤다고 한다. 즉 젊은 사람들이 술과 관련해서 비명횡사하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한 것이다. 주민들은 ‘병목재의 큰 돌이 술병을 막고 있었는데 병의 뚜껑을 열어 버리니 마치 술병이 마을을 향해서 흘러넘치는 형국이라 주민들이 술로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해서 주민들이 병목재의 돌을 제 위치로 옮겨 놓았더니 그 후로부터는 궂은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강대윤(전면장), 조광운(전농업진흥청서기관) 오창선(전면장),오우영(전면장),오병열(국교장)
거처/생가/묘소
마을 왼쪽에는 독배기라 부르는 둔덕이 있는데 이곳에 상산 김씨의 묘지가 있다. 예전에 이곳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현재는 조그만 나무들이 묘를 둘러싸고 있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독배기와 복용리 대곡마을은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그러한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독배기에 비석을 세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곡에서 바라봤을 때 독배기의 비석은 마치 발기한 남성의 성기처럼 보여 여자들이 바람난다는 것이다. 애써 김씨들이 비석을 세우면 대곡남자들이 몰래 와서 비석을 넘어뜨리고 간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김씨 문중에서는 비석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보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인 상곡봉을 ‘웃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웃골에는 금스렁골이라는 습지가 있다. 그 습지 위에는 여자의 성기를 닮은 바위가 있어 주민들은 그 바위를 ‘**바위’라 부른다. 그 바위의 오목한 곳에는 한 종지 가량의 물이 늘 괴어 있다고 한다. 그 물을 떠다가 남자들이 먹거나 바르면 남자 성기와 관련된 병들은 대부분 낫는다고 한다. 해서 지금도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몰을 받으러 오는 일이 많다고 한다. 마을 앞 병목재 부근에는 ‘소명교회’의 신도들이 입주해 있는 빌라가 두 채 있다. 모두 12가구가 사는 규모인데 전부 외지에서 온 사람들로 대부분 교회 신도들이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과의 교류는 없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육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에서 도대, 복룡, 송현, 상마, 구로, 청계 등 여섯 방면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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