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里는 건지봉 안쪽에 해당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마(良馬) 마을은 馬山과 良洞을 이르는 말로 행정구역상 몽탄면 내리 3리에 해당된다.
마산은 마을 모양이 말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동은 원래 따뜻한 마을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良洞으로 변하면서 현재의 의미인 마을의 모습이 말의 형태이나 어진 말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인동 장씨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장부개(張傅凱. 1452-1508)이다. 장부개는 연산군 시대 사람으로 자는 화지(和之)이며 호는 묵암(黙菴)으로 벼슬은 돈령부영사에 올랐다. 태사(太師) 포음 길(吉)의 후예로 경상도 안동에서 살았는데 연산군 시절(1504년) 폐비 윤씨 사건(갑자사화)에 바른말을 하다 화를 입어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와 터를 잡았다. 후일 벼슬이 복원되어 왕조에서 불렀으나 올라가지 않고 이곳에서 머물러 식솔들을 부양하니 인동장씨 무안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양동 마을은 장부개가 처음 귀양 왔을 때 머물렀던 마을이다.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 기슭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후일 마산 마을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번성해지자 경상도 옥산에 살던 玄孫 장육(張淕)이 1635년에 옮겨 와 터를 잡아 형성된 것이다. 원래 양마 마을의 형성은 양동 저수지 위 터에서 비롯되었으나 차츰 아래로 내려 와 현재의 터에 정착한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인동 장씨 집성촌으로 구산마을 장씨와 같은 파이다. 최근 귀농인구가 유입되며 타성이 많아지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陽洞[볕골]과 馬山[말뫼] 마을로 나오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는 陽洞이 良洞으로 바뀌어져서 나온다. 아마도 일제의 한자 간소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명의 한자가 변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행정구역 변경
內里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의 지역인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산동, 남천, 마산, 연화촌, 양동, 호동 일부를 병합하였다. 1932년에 석곡면에 그리고 1939년에 현재의 몽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무안으로 가려면 큰한잿재, 작은 한잿재를 이용하였다. 작은 한잿재를 넘어 물맞이골로 넘어 다녔다.
가마니와 모시를 짜서 한재를 넘어 무안으로 팔러 다니기도 하였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지속적으로 귀농 인구가 들어오고 있다. 최근 새로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짓는 귀농인 들이 많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 뒤 양동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독샘’이라는 옹달샘이 있었다. 샘물의 약리작용이 뛰어나 난치병을 앓은 사람이 그 물을 먹거나 나병환자들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효험을 본다는 말이 전해졌으나 현재는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저수지를 만들어 버려 구전으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독샘의 물이 약수였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산 마을은 뒷산인 馬蜂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양마 마을은 건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을 향해 뻗은 골짜기 마다 적치재(붉은 꿩이 앉아 있는 형상), 노서골(늙은 쥐의 형상), 성적골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양동 마을에서 대치리 장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쭉짓재라 하며 범바위와 범바윗골도 있다.
동/식물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며 당산제도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쭉짓재, 범바위, 범바윗골, 성적골, 구수, 말밥통(하천가가 뒷산 마봉의 밥그릇자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에 전해오는 상여소리, 논매기소리, 들노래 등은 소리가 깊고 맛깔스러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널리 알려졌으나 지금은 소리하는 사람이 없어 그 구성진 타령을 들을 수가 없다.
배암날 구정지난 보름에 제사를 지냈다. 음력 10월 초하루 시제를 모시러 160여명이 오기도 했었다.(압해도 등지에 인동 장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 뒤에 있는 연궐정은 입향 시조인 장부개가 귀양 와서 지었던 정자로 귀양살이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장소로 쓰였던 곳이다. 비록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왔지만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정자 가운데 드물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도 갖추고 있다. 1810년 대 총지사가 소실될 때 사찰을 받치고 있던 기둥과 기와의 일부를 가져와 정자의 중수 시 사용해 자칫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 지역의 큰 사찰이었던 총지사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자를 받치고 있는 한 개의 기둥과 대들보는 칡넝쿨을 사용해서 지어 모과나무를 기둥을 갖고 있는 청계면 청천리의 화설당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정자에는 6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총지사 복원 시도가 있어 왔지만 사유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을 뒤 밭에 있었던 3기의 고인돌은 현재는 없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분청자기 맥을 잇고 있는 김두석 도예가의 장산요가 마을에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감디 할머니 이야기는 마을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도 귀감이 되어 후세 교육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감디(감돈리에 살았다해서 불린 이름)할머니는 22살에 혼자 되었는데 주변의 유혹에도 끝까지 수절해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성정(性情)이 찾아오면 주변의 모든 것이 남자로 보였다고 할 정도로 흔들릴 때가 많았었는데 끝까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 지금도 마을 어른들은 감디 할머니의 이야기를 교훈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감디 할머니에게는 장순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 또한 좋은 일을 하다 목숨을 잃게 되어 마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로 피신왔던 김문옥(전 국회의원 - 가수 남진의 아버지), 김상두(삼학소주 창업주)씨를 이 아들이 숨겨주었는데 후에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 아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해서 지금도 감디 할머니의 손주들은 경제적 기반을 잡지 못해 어렵게 살고 있다. 마을에서는 감디할머니의 열녀행과 그 아들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했다.
감디 할머니(장옥순 씨의 증조할머니)와 아들 장순진(오갈재에서 총살)의 기념비를 세우고자 했으나 지원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삼학양조장 부인, 김문옥(전 국회의원) 부인이 자매로 마을 출신이었으나 당사자들이 기념사업에 대한 지원을 외면하여 아쉽다.
전대 부총장을 역임한 장우건 씨도 마을 출신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2004년 무안군 친환경마을 선정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이 마을은 제초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마을 주민들의 의식이 앞서 있다.
2~3 가구가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마을 앞에 흐르고 있는 대치천을 이용하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웰빙 공간을 조성하여 관광 자원화하는 계획을 갖고 있기도 했으나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욕심이 없고 공기가 좋아 살기 좋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몽탄 서교는 마을사람들이 땅을 내고 울력해서 만든 학교였다.
몽탄 서초를 개인에 판매할 때 청년회에서 반대를 했으나 결국 판매되었다.
태양광 패널이 들어설 때 화산마을은 큰 피해가 없는데 보상이 되었고 오히려 실질적인 피해가 있는 양마마을에는 보상이 없었다고 한다.
주민요구사항
대치천 정비할 때 팽나무군락이 있어 공원화 시킨 장소가 있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 아쉽다. 군 또는 면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