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사마2리 청계면 사마동 작성
  • 사마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5세대 54명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사마동은 사마2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사마리 라고도 불린다 .마을 유래지에는 사마동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 입향조가 사마원공 벼슬을 하여 그 직책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司馬洞 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司馬라는 단어는 벼슬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 때의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제도의 하나인 “사마시”에서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굳이 벼슬로 말한다면 백제때의 외관직 벼슬이었으며 조선초기에는 훈련관의 종사품 벼슬을 나타내는 정도이다.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벼슬이다. 중국에서도 동한 및 삼국시대에는 병졸이나 과원을 통솔했던 벼슬이라고 나오기도 한다.굳이 풀이 한다면 사마원공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아니라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말을 관리했던 이마을의 입향조는 전주 최씨이다. 崔 暘 (1580-?. 자-창덕)이 1600년대 초반에 이마을에 들어와서 터를 잡은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뒤이어 달성배씨와 진주정씨가 들오왔다. 최씨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선조가 괜바윗등 아래서 무안현감의 말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고 한다. 괜바윗등은 마을 윗쪽 ,현재 폐차장 옆을 말하는 곳으로 고인돌이 많이 있었던 능선이다. ‘괜바윗등에는 4채의 기와집이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더구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에 유독 말(馬)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우선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협봉이 있으며 그 아래를 암구마봉, 숫구마봉이 있고 마을의 주산에 갈마봉이 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다] 특히 사마동 옆 아래 호치에서는 마방이 있었다. 마방이란 외양간 마굿간의 설비가 있는 주막집인데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다. 처음에 마을이 조성된 곳은 현재 수양주유소와 가스저장소 사이의 골짜기인데 주민들은 이곳을 구말고랑이라 부른다. 이 주변에 있는 사마저수지 아래에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기도 한다. 지금도 이 주변을 파 보면 기와조각 및 많은 그릇 조각들이 나온다. 또한 가스 저장소 옆에는 땀딱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은 아무리 날이 가물러도 물이 마른적이 없다고 한다. 이 샘물이 얼마나 시원 했든지 그 물로 등목이나 목욕을 하면 땀띠가 없어진다고 해서 땀딱샘이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래로 내려와 현재의 장소에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최,배,정,장,,심,나,노,서,조,류,고,이,김씨등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몇십년전까지 진흙을 파서 팔았다
주요시설
호남농산,봉불사사찰
마을변화
마을은 사마동 마을과 호남동(정)으로 이루어졌다. 호남동은 사마동 마을 앞의 조구만 마을로 원래는 정씨들 터였는데 한 두가구가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호남동의 유래는 호남동 같은 정서적 의미가 아니라 호봉 또는 호치 남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오른쪽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동각과 함께 방풍림 구실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유당농원이 막히기 전까지는 그밑에까지 창포만의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동각은 1998년에 세운 것으로 그 앞에는 표지석이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호랑이는 호봉을 말하며 옥녀봉은 현재 사마저수지(건방죽이라고도하며 1945년에 만들었다)가운데 우뚝 서 있는 봉우리이다 또한 상좌는 봉불사 뒤에 있는 봉우리이며 장무는 마을 뒤에 있는 장뭇 등을 말한다. 또한 거문고는 진주 정씨의 선산의 거문고 혈 자리를 말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암구마봉,숫구마봉,구말고장,지릿골,괜바윗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뒷 마을인 화설당과 사마동을 가르고 있는 산이 갈마봉이며 마을로 넘어오는 등을 지릿골 또는 질흙골이라 하는데 현재 도자기 공장이 있는 주변 골짜기이다. 이 질흙골 주변에는 질좋은 점토가 많이 나와 이 흙을 이용해 기와를 굽기도 하였으며 얼마전까지 주민들은 이곳에서 나는 점토를 목포의 행남자기 공장에 팔기도 하였다 지금은 밭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 기와 가마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이가마는 동학 농민봉기 때 동학군들이 피신처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갈마봉에는 세개의 몰무덤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임진왜란등 난리에 죽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었다 해서 몰무덤이라 했다 한다. 나중에는 발음이 전이 되면서 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모두 없어졌으며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주민들이 고름장(고려장)이라 부르는 곳이 세 군데나 있었다. 괜바윗등은 고인돌이 있는 능선이란 의미로 5기의 고인돌이남아 있었다.주민들은 처음에는 한개만 남아 있다고 했으나 확인해본 결과 5기를 발견한 것이다.함께한 주민들의 말로는 예전에는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등을 하면서 많이 가져 갔거나 돌을 쪼개서 사용했다고 한다.마을은 지반이 거대한 석회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낮은 지대에서 곡갱이로 바닥을 찍으면 ‘떵’하는 장구소리가 나기도 한다.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사마동유물산포지’ 가 있다 이곳은 마을의 북쪽 해발 27m 구릉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마협봉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리는 산자락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물산포지의 앞으로 소하전이 흐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과수원과 밭으로 이용되고 유물로는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연질토기편등이 확인 되었다.하지만 주민들은 이러한 발굴조사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호남동에는 진주 정씨의 재각인 ‘죽우재’가 있는데 5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4칸 팔작지붕으로 1983년에 지은 것이다. 재각뒤에 진주정씨 선산이 있다.
설화
이 마을에는 주위 지명을 이용한 옥녀봉의 전설이 있다. 즉 마협봉 줄기의 백운산에서 흰구름을 타고 내려오던 옥녀가 앞에 떠억 버티고 있는 호봉의 호랑이를 보고 놀라 주저 앉아 버렸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던 옥녀는 장구를 치며 상좌와 옥녀소반 그리고 춤을 추며 거문고를 타면서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정광섭(면장)정규동(면장),류호철(안양대교수) 정인홍(조선대교수)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현대목재,명진산업,광주기업,대도정미소,종합폐차장,하나설비,보배환경자원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 호남동 뒤에는 비구니 사찰인 봉불사가 있다 봉불사는 제22교구 해남대흥사 말사로 1982년 지륜비구니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불교신문에서 “가고 싶은 절”로 소개되고 2014년에는 전남교육청으로부터 학교폭력 예방 및 치유를 위한 기관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2024년 10월6일에 관음전이 명상심리상담센터인“사티”로 개원을 해 낙성식을 봉행했다(사티=사띠:인도말 명상에서는 알아차림의 뜻) 지오 큰스님은 2009년 명상심리 상담센터를 개설해 공양간에서 강의와 상담, 공양을 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1500여명이 참가한 유명한 사찰로 알려지면서 모두의 숙원 사업인 쉼터가 완성 되었다 0.프로그램:청소년명상캠프,사별가족치유프로그램,에니어그램,스트레스클리닉,어머니의교실, 부부관계 회복하기 등이 있다. 0. 2024년 기준 프로그램실적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 8주명상 : 8회197명 -청소년명상캠프 : 45회 연인원900여명 -어머니교실: 7회82명 -교사직무연수 : 11회189명 -승려연수 : 3회27명 -사별가족치유프로그램 : 3회31명 -그외 외부강의 다수 ● 선조3년에 배 경이라는 분이 사마 진사에 합격하여 이 마을에서 살았다.이후 말년에 무안읍 평용리 삼로동으로 이주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애를 보냈다(2008년 3월2일 배태우 선생 증언) ● 2016년 3월9일 정화삼회장의 증언 진주정씨가 사마리에 정착한것은 나로부터 고조때이다. 당시 청계면 월선리에 살았는데 마을에 화재가 나 무안읍 도산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다, 도중에 사마리에서 멈췄는데 주변의 산세가 좋 고 살만하다 여겨 정착하게 되었다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