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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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 3리 청계면 사마리 작성
  • 사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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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18세대, 35명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箭里는 사마3리에 속한 마을로 청천리 앞 바이오에너지센타에서 창포쪽으로 1Km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깃대봉을 배경으로 하고 주치봉을 마주하고 있다.이곳은 조선시대에 화살을 만들던 마을이 아닌가 추정되지만 지금은 ‘전리’에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節里’라 부르고 있다. 주민들은 ‘절리’에 대해 절개를 지킨 여자가 살았던 마을 또는 마을 유래지 표기처럼 화설당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수천가에 있는데 그 하천에서 풍겨 나오는 계절의 향기가 절기마다 뚜렷하다해서 불렀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우선 1789년 호구총수라는 문헌에 節里로 나온다.節은 화살대를 만들기에 적합한 작달막한 대나무를 뜻하거나 화살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을 이름에 화살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었일까? 그것은 창포만 건너 맞은편 마을인 평용마을에 있었던 활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즉 평용마을은 예전에 국창이 있었던 곳인데 그곳의 관리들이 활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추정할 수있었던 것은 마을 곳곳에 시누대가 자라고 있었으며 주민들 스스로 알고 있듯이 주변 마을에서 이마을 주민들에게 ‘절리놈’ 이라 하며 천대했다는 사실등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는 절리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1912년과1917년의 자료에 남계동으로 나온다.남계라는 지명은 남안리 남쪽시냇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다.하지만 광복이후 다시 전리라는 지명을 쓰지만 원래의 뜻은 사라지고 소리나는 대로 절리라 표기하여 다른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구전에 의하면 입향조는 300여년 전에 들어온 탐진 최씨 최광국이다. 그는 낙향하여 산천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러 잠시 쉬었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뒤편에는 파란파도가 넘실거려 그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 하였다고 한다. 그후로 경주정씨와 진주강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안 세적지에 입향조는 崔天綱(호 淸隱, 영조대)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나주 초동에서 살았으나 이곳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자손대대로 번영하며 살 수 있도록 옮겨 왔다는 기록이다. 특히 효제를 실천하고 독서를 하며 자손들에게 의롭게 살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최씨(탐진),정,강,이,장,김,노,박,소,조,진씨등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창포만이 간척되기 전에는 마을이 반도형으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지층이 바위로 이루어졌다. 예전부터 물이 귀한 지역이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현재의 무안읍 평용리의 삼로동과 같은 사마3리 였으나 90년대 행정구역 개편때 분리되어 현재까지 독자적인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의 세대수가 15가구 안팍으로 늘 일정하며 세대간 빈부의 차이도 없다 .마을의 청년들이 억세고 단합이 잘 되어 주변 마을에서 어려워했다. 마을의 뒷산을 깃대봉이라 하며 측량 표지석이 있다. 주민들은 마을 중간에 있는 팽나무를 중심으로 아랫마을은 절리, 윗마을은 남계로 분리하여 부르고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능선에서 숯구덩이와 옹기를 구운 후에 나오는 찌꺼기등이 발견되어 혹시 이곳에 옹기를 굽는 곳이 있었지 않았는가 여기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때는 정참사라는 사람이 현재 대밭으로 변해있는 곳에 선대 묘를 썼다. 그리고 재각을 두어 묘를 관리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마을의 규모가 괜찮았다고 한다. 당시 정참사는 무안 제일의 부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씨묘를 몽탄면 달산리로 이장 해 가면서 재각과 관리사는 무너지고 잡초가 우거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주요시설
내원사사찰,나산냉동,수산업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내원사사찰(주민다수 불교인) -마을회관이 없고 마을입구에 간이 동각을 마련해서 이용함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포구로 사용했던 바우백이 마을 전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창포만 쪽으로 뻗어 낭떠러지를 이루면서 천연의 포구를 이루었던 곳이 바우백이인데 서해바다로 나가거나 한양등으로 나갈때 이용했던 포구이다. 그 바우백이 아래에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청천리, 남안리,평용리의 물이 모이는 지역이라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해수찜하러 인근 마을에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래는 주변 시 군에 건축자재로 팔려가기도 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은 지명으로 절터가 있었다는 건석골,달건네,족판머리,팽나무개 나들이개,건강에 좋고 인근 주민들까지 즐겨 목욕한곳 옴둠벙 등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얼마전까지 마을에서는 방천제(防川祭)를 지냈다.갯물이 들어오는 둑에서 백중날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地神,海神께 지내는 제사로 그날에는 마을의 모든 주민이 나와 둑이 무너지지 않게 농사가 잘되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디.
유물, 유적
고분이 문화재청에 등록되어 있는데 주민들은 모름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이마을에는 동학군들의 아픔이 배여 있는 장소가 있다. 윗마을인 청천리의 맑으내는 동학봉기 때 농민들의 의사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동학군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또한 동학군들이 창포만을 이용해 해제의 동학연병장까지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동학이 실패로 끝나면서 무안지역의 동학군만 아니라 타지역의 동학군들이 관헌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가고자 이곳 창포만의 바우백이로 숨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낌새를 알고 바우백이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관헌들에게 붙잡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장보름(진도 수석국악인,씻김굿)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신경하,박현욱,박익수(호남대교수)박사출신 - 무안에 최초로 양파를 알려서 심게 하신분(강동원) 엄마가 일찍돌아가신후 새엄마와의 불화로 일본으로 건너가 양파재배농가 체류시 양파종자1홉과 재배기술서적을 함께 막내숙부인 강대광씨께 보내 양파재배를 성공시켜서 오늘날 무안의 대표농산물이 되었다. - 코레일광주본부에서 무안역에 양파 조형물을 설치해놨다(? 1/28)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마을은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일어나면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죄수들이 승달산 줄기를 타고 도피하면서 이마을까지 몸을 숨기려 왔던 것이다. 옆마을인 아래 호치에서는 많은 죄수들이 잡혀죽었다. 당국에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리에서 시루봉까지 인의 장막을 쳐서 죄수를 수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때는 한가족 6명이(경주정씨) 몰살 당하는 아픔도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에서 서호리를 거쳐 상마리까지 나있는 도로는 소화 13년(1938년)에 만들어진 신작로다. 이도로는 청계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신작로인데 주변의 풍부한 농산물을 가져가기 위한 운송로이기도 하였다. -이마을 사람들은 부자여서 영농자금도 쓰지않는다함 -마을사람들 스스로 주변정리를 깨끗이 한다함 -자영업자가 많고 수급자가 없다고함 -마을 앞에 병자샘이 있었다. 병자년에 팠거나 병자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인데 평용마을,청천리,화설당등 농지에 전부 물을 댔던 샘이다.지금은 메꿔지고 이름만 남았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나산냉동, 유림수산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강대원(청계도림리) 청계국도 1호선 도로변에 최초로 벚꽃가로수길 조성하였음(대광씨 바로 윗형님)
기타사항
- 내원사 사찰(마을 불교신자 많음) - 마을분들은 자영업으로 살고 외지인들이 농사를 짓는다 - 이마을에 들어오면 다 부지된다: 수급자와 단독세대가 없으며 영농자금도 쓰지 않는다 - 서로 잘 돕고 단합이 잘된다 - 마을 앞을 지날때는 예의를 지키게한다 고 마을 에서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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