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리(山吉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지도 쪽으로 22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등, 구등, 강산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광복 이후 간척으로 이루어진 농장이 산길리 전체에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산길1리인 신등마을은 용골, 등길골, 감나무골, 신등으로 이루어졌다. 22번 지방도로에서 원갑사 쪽으로 약 1km가량 들어오면 만나는 마을로 오목한 곳에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지명유래
'마을 앞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을 내왕할 때 산의 재를 오르내린다고 하여 ‘등길(登吉)’이라고 하였다.’라고 무안군 《마을유래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신등길리, 구등길리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시에 신등리와 구등리가 되었다가, 현재의 ‘신등’이 되었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의《마을유래지》에서는 이 마을의 입향조를 강위석(姜渭碩) 선생으로 보고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도리어 그의 부친인 강흘(姜屹. 호-의헌(義軒), 1571∼1592) 공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북 순창에서 세거하고 있던 강흘 공은 아우 진과 함께 우계 성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이 일어나자 화순, 순창, 남원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김천일 장군과 함께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김천일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일생을 마쳤던 의로운 선비이자 의병장이다. 그리하여 강위석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평소 입던 옷과 물건만을 수습하여 고향인 전북 순창으로 가지 않고, 이 마을에 들어와서 터를 잡아 살면서 모시게 되었다. 강흘 공의 묘는 현재 광산리 발산마을에 있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그의 의로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비석에 글을 남겼다. 묘갈명 뒷부분의 추모시를 옮긴다.
“비석에 기록되기를, 아! 이것은 의헌 강공의 옷과 신발이 묻힌 곳이로다./ 남강의 물결은 끊이지 않으니, 그의 혼도 죽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변하지 않으니,/ 영원히 세 장사(壯士)와 함께 전해지리라."(銘曰。嗚呼此義軒姜公衣履之瘞。南江之水波不竭魂不死。天壤不易。尙同傳於三壯士。-義軒姜公墓碣銘 /『松沙集』)
그런데 지난 1988년에 해제면지발간위원회에서 간행한 《내고향 해제고을》에서는 해제면 입향시조가 중종 시기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영광에서 살다가 순창으로 그리고 다시 해제면 등길리로 입향한 진주강씨 강안국(姜安國, 호-모재(慕齋), 1478∼1543)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깨뜨린 기묘사화를 피하여 낙향한 강안국, 엄순용, 강은, 오경, 성두문, 임내신 등 여섯 선비는 경기도 이천의 육괴정(六槐亭) 등의 정자에 모여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들을 가리켜 괴정육현(槐亭六賢)이라고 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단치산을 주산으로 하고 와필형(臥筆形)의 안산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와필형국(臥筆形局)이란 마을의 지형이 누워 있는 붓의 형태를 닮았으며, 이는 풍수에서 땅의 기운(地氣)이 모이는 좋은 자리로 간주한다. 특히 학문적 성취나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월봉재와 운곡산방 등의 강학처는 물론 많은 문인과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마을의 서쪽 지형이 학의 형국이라 하여 ‘학두원 또는 학두평’이라고 불렸다. 예전에는 마을을 중심으로 ‘학두원’과 ‘갯모실’에 각각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마을의 풍수적인 균형을 이뤘다고 하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학두원 앞에는 김장의 재료인 청각이 많이 나던 ‘청각여’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는 물이 빠질 때만 드러나는 바위로 맞은 편에 있는 뱀의 형국인 강산과 대치를 이루었다.
마을성씨
진주강씨 자작 일촌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내왕할 때 산의 고개를 오르내려야 하기에 등길(登吉)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때 강산(糠山)의 ‘산(山)'자와 등길의 ’길(吉)'字를 따서 ‘산길리(山吉里)’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지명은 최근에 생겼다는 뜻의 ‘신등길(新登吉)’ 또는 ‘신등길리’였다가, 이후 ‘신등리’ 그리고 ‘신등’마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함평현 해제면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정기 행정구역 개편 때 무안군 해제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신등길리로 나오지만,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신등리로 나오다가 1917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신등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 자료에 해제면 산길1리에 속한 신등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4번 지방 도로에서 원갑사로 가는 도중의 오목한 곳에 있는 신등마을은 따뜻한 햇볕이 모여듦과 아울러 겨울의 추위에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진주강씨 집성촌으로 주민들 간에 형성된 끈끈한 혈연적인 유대감은 그대로 마을의 성격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마을의 농경지는 물론 인근에서 대규모로 간척된 태원농장 등에서 벼농사를 비롯하여 양파, 양배추, 마늘, 고추 등의 밭농사 등 전통적인 농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에 50대가 서너 명뿐이고 대부분의 주민이 70대 이상인 급속한 노령화가 진행 중이다. 그리하여 농사 역시 대부분 기계화와 외국인의 손을 빌리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집을 짓거나 빈집을 사서 이주해온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안과 목포 등 인근 도회지에서 생활하며 주말 등에만 다녀가고 있다. 이처럼 마을에 이질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부녀회 등에서는, 매년 어버이날 또는 어르신의 칠순, 팔순 등을 마을잔치로 진행하여 마을의 정과 유대감을 지켜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총회,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신등마을회관(노인당 겸용)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상수원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5개의 우물이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다. 그래서인지 용샘이란 지명도 남아있는데, 이는 마을 옆에 있었던 샘으로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으나 현재는 농경지가 되어있다.
동/식물
동네 뒤편에 매년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목인 수백 년 된 수령의 팽나무가 있는데 무안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있는 지명으로 감나무길인 시목동, 새쟁이, 문필봉 아래의 갯마실, 감불(감중련), 지형이 비룡망해(飛龍望海) 형국이라 붙여진 마을 입구에 있는 용골 등이 남아있다. 또한, 간척사업으로 태원농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마을의 앞들을 ‘촌전들’이라고 불렀다. 이외에 마을에는 ‘솔대길’이라는 명칭도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 출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배출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을길에 붙인 이름이다. 솔대는 솔터라고도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 전날인 14일 오후에 당산제를 지내 한 해 동안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다. 예전에는 꽹과리 등 농악놀이가 함께 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모은 쌈짓돈으로 제사상을 만들어 제를 올린다.
유물, 유적
이 마을은 진주강씨 문중만이 아니라 여산송씨의 해제면 최초의 입향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진주강씨 문중으로 장가를 들면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송득현(1624∼1692)과 강시헌(1661-1712)이 양가의 자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운 강학소인 월송재(月松齋)가 있다. 이를 《무안군사》(務安郡史, 1994)에서는 '海際坊에 있으니 姜宋兩性世守講學之所라 詩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월송재는 지역의 후학들을 기르기 위하여 1674년에 두 채의 초가집으로 시작하였으나, 조선말에 농촌 송유옥(聾村 宋維玉, 1832∼1908), 백계 강율수(栢溪 姜嵂秀, 1881∼1951), 만취 강대석(晚翠 美大錫, 1828∼1906), 농은 강대연 등 유명한 식자들을 배출할 정도로 의미 있는 배움터로 발전하였다. 이후 1875년 강연회(姜淵會)가 중수하는 등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오다 1978년 현대식 건물로 개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당당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으며,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의 월송재 주변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있어서 동재와 서재를 안고 있는 재실로서의 위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300여 년이 넘는 팽나무 세 그루와 나머지 두 그루가 숲을 형성하고 있어 과거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둥에는 많은 주련이 있었고 중수기와 시 등을 적었던 현판들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 등의 시와 기문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1910년에 강율수(姜嵂秀, 1881∼1953) 선생이 강학소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운곡산방(雲谷山房)이 있다. 운곡산방이란 주자가 노닐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아들 성효(性孝)가 중건하여 거처하고 있다.
그리고 원갑사의 옛터로 여겨지는 고사동에서는 낡은 절골, 기왓장 등 절터의 흔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고사동은 인근 주민들이 ‘기와받이’ 곧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사람과 사람에게 기와를 옮기는 일를 하면서 현재의 원갑사를 이룬 절터라고 전한다.
설화
마을의 뒷산은 단재산, 망재산, 또는 단치산, 망산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전부 백계 강율수 선생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 백계 선생이 산 위에다 단을 차려놓고 북향하며 곡(哭)을 하였던 데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산 정상에는 그때 백계 선생이 써서 각(刻)을 했다는 큰 돌이 있는데, 그 돌에는‘의고대(偯古坮)’라 새겨져 있다. 또한, 앞산은 문필봉으로 와필(臥筆)의 형국을 하고 있어서 대대로 이 마을에서는 선각자들이 끊이질 않고 배출된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기록물, 문헌
마을에는 1938년에 문인들이 세운 ‘농촌송유옥유적비’와 1939년에 전남과 충남지역의 문인들이 건립한 ‘송호강호영유적비’그리고 1969년에 역시 문인들이 건립한 ‘백계강율수강도압비’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학문적 성취와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와필형국(臥筆形局)을 지닌 이 마을에는 수많은 선비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이 마을의 강학처인 월봉재에서 수학하고 강학소인 운곡산방(雲谷山房)을 세워서 지역의 인재들을 양성하였던 강율수(姜嵂秀, 1881∼1953) 선생을 해제지역의 주민들이 지난 1998년에 간행한 《내고향 해제 고을》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강율수 선생은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농촌 송유옥과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장해서는 월송재에 기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주자갈필각판(朱子葛筆刻板)을 소장하고 주자학 탐구에 열중하여 마을에서 선생을 운곡산방(雲谷山房)이라고 불렀다.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선생은 음식을 먹지 않고 마을 뒤 단치산(丹峙山, 주민들은 땅개산이라 함)에 올라가 단을 설치하고 고종황제를 배향하였다. 국상을 당할 때 쓰는 백립(白笠)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강율수 선생은 학문이 높아 학송리 학암의 춘사 김원표, 덕산리 사야의 사은 김경현, 양매리 매곡의 잠와 김용수 등과 함께 해제의 4선생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평생을 주자학과 인재 양성에 몰두하였던 선생은 72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다. 이 마을 출신의 현대 인물로는 강흘 공의 13대손인 강용구 씨가 목포고와 전남대를 나와 현재 넥센타이어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앞에 태원농장 간척지가 크게 개발되어 초기에는 마을주민들이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고령화와 기계화로 짓지 않고 있다. 또한, 1987년에 마을의 농가 약 87호에서 출자하여 만든 ‘그루터기 작목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