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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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길2리 해제면 구등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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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노인회장 김정기 010-8601-7568 부녀회장 김춘희 010-5444-7587외 4명
자연마을 구성
산길리(山吉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지도 쪽으로 22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등, 구등, 강산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광복 이후 간척으로 이루어진 농장이 산길리 전체에 펼쳐져 있으며, 산길2리인 구등마을은 삼거리와 본 마을인 구등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앞으로는 태원간척지의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으며 큰 노루섬과 작은 노루섬이 보인다. 마을 주변에 고총(古塚)이 많아서, 자료에도 선사유적지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유래
마을 앞뒤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을을 내왕할 때 산의 재를 오르내린다고 하여 ‘등길(登吉)’이라고 하였다.’라고 무안군 《마을유래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신등길리, 구등길리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구등리로 되어, 현재의 ‘구등’이 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다른 지명유래를 기억하고 있다. 즉, 조선시대에 양곡보관창고가 마을에 있어서 ‘창골’이라고 부르다가, 그 후 산에 오르면 길(吉)하다고 해서 오를 등(登)자에 길(吉)자를 따서 ‘등길(登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라고 주민들이 알고 있어서, 이를 확인하고자 김씨 문중의 족보 등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자료가 불비하였다. 그리하여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주민들의 주장에 의하여 이후에 함풍이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마을의 지명을 통해서 이를 살펴본다면 구등마을이 신등마을보다 먼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산길리의 번지가 구등마을에서 비롯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형국은 천등산을 주산으로 하고 문필봉과 잿등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는 와우형의 지형이다. 여기에서 와우형의 지형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와우형(蝸牛形)은 달팽이(와우, 蝸牛) 모양과 유사한 지형을 의미하며, 주로 소규모 구릉지나 산지에서 나타나는 지형의 형태학적 특징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와우형(臥牛形, 누운 소 모양)의 지형은 마치 누워있는 소의 형태를 닮은 데서 비롯된 상징적 해석으로, 풍수학에서 안정과 풍요를 상징하는 길지(吉地)로 평가된다. 이와 같은 마을의 지형에 더하여 주민들은 마을의 지세(地勢) 곧 땅의 기운이 호랑이 형국을 닮아 일제강점기나 기타 변란의 시대에 마을주민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내왕할 때 산의 고개를 오르내려야 하기에 등길(登吉)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때 강산(糠山)의 ‘산(山)'자와 등길의 ’길(吉)'字를 따서 ‘산길리(山吉里)’라 하였다. 하지만 1789년의 《호구총수》나 진주강씨, 김해김씨 족보 등에서도 마을지명은 원래 있었다는 뜻의 ‘구등길(舊登吉)’또는 구등길리였다. 하지만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구등’마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또한 주민들은 원래 구등길(舊登吉)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구등(舊登)하면 의미가 없지만, 구등길(舊登吉)이라고 하면 지명이 갖는 본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함평현 해제면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정기 행정구역 개편 때 무안군 해제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구등길리로 나오지만,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구등리로 나오다가 1917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구등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 자료에 해제면 산길2리에 속한 구등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주민들이 화목하며 단합이 잘 되고 또한 개척정신도 강하다. 1970년대 중반에 나무젓가락과 성냥의 재료가 되는 버드나무를 마을 주변에 심어 많은 소득을 거뒀다. 1976년에는 이러한 마을의 노력이 인정받아 새마을사업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하사금을 받기도 했다. 그 자금으로 2,000여 평의 마을 공동토지를 사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까지 마을 공동재산으로 남아있다. 최초로 전라남도에서 지정하는 친환경마을로 선정되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주요시설
꽃샘, 전원교회.
마을변화
벼농사를 비롯하여 양파, 마늘, 양배추 등의 농사를 생계로 하는 농가가 11가구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40여 가구는 노령연금 등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다. 이는 50대 이하 젊은 세대와 최근 귀촌한 세대가 예닐곱 가구에 지나지 않는 현상과 맞물려 초고령마을로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구등마을회관(경로당 겸용)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대규모 간척이 이뤄지기 이전에 마을 앞에는 황금어장이라고 일컫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수량이 풍부한 두 개의 샘이 있었다. 이는 암샘이라고 부른 천등산에 있는 샘과 숫샘이라고 부르는 마을에 있는 꽃샘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암샘보다 숫샘의 물을 주로 사용하여 생활하였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이후 해제지역에도 상수도가 보급되어 꽃샘이 예전처럼 주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꽃샘 사거리는 예전에 마을의 번화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다. 이러한 꽃샘을 주민들은 지금도 잘 단장하고 보존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식물
마을 앞에는 태원농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농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마을 앞 갯벌이 황금어장이었다. 상쾡이를 비롯하여 각종 수산자원이 많았는데 물길이 막히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더욱 아쉬운 것은 황금어장을 잃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오래전 잿마당 주변에 장정들의 세 아름이 훨씬 넘어 보이는 팽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주민들이 베어버리면서 그때까지 행하던 당산제나 마을놀이 등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양곡을 저장했다는 양창 또는 천석을 보관할 수 있다 해서 양천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남아있다. 조선시대까지 있었다는데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용혈 옆을 ‘걸안지’라고 하며, 아이들의 무덤터였던 여시골, 꼬지등 마을 입구에 있는 잿마당, 달맞이를 했던 대줏골, 짜박골, 고재기, 재롱고지, 데루골, 중시, 샘고랑 등의 지명이 있다. 또한 깔따구 때문에 소가 죽었다는 ‘소죽은골’등도 있다. 천등산 정상에는 전원교회가 들어서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마을의 잿마당에 있었던 당산목인 팽나무 앞에서 주민들은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또한 마을놀이 등을 했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또한 마을 왼쪽에 있는 잔등에서는 달맞이를 하며 1년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마을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이러한 의례 대신 지금은 어버이날이나 한여름 복날에 마을잔치를 벌이고, 또한 매년 마을주민들이 함께하는 단체관광을 다녀오는 행사를 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의 김해김씨 가문과 진주강씨 가문에서 교지와 호구단자 등의 많은 문헌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진주강씨 집안에서는 300여 년이 넘는 기간의 ‘호구단자’들을 시대별로 깨끗하게 모아놓고 있다. 이는 앞으로 지난 시대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전에 이 마을에는 간이학교도 있었다
설화
마을 뒤 용혈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현재 그곳에는 우리농산물창고가 있는데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요즘에야 안정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근처 마을의 한 가문에서 용혈 주변에 묘를 썼다가 집안에 불구자가 많이 나와 지금은 묘를 전부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용혈에서 궂은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천둥이나 벼락에 놀라는 용의 등에다가 건물을 짓거나 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록물, 문헌
마을회관 옆에는 1999년에 세운 <이재록목사 송덕비>가 있다. 또한 구한말 임자도에서 들어온 임씨는 이 마을에서 부를 이루어 해제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임씨터에 1942년에 세운 <도은임선생비>가 서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은 만민교회의 이재록 목사가 태어난 곳이다. 이 목사는 세 살 때 마을을 떠나 장성으로 이사했지만, 어렸을 때의 특출했던 행동은 주민들에게 여러 이야기로 회자하고 있다. 그가 이 마을을 떠나기 전 겨울에 주변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는데, 어린 나이의 이 목사가 꽃샘 거리에서 뒷짐을 지고 동녘 하늘로 떠오르는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때부터 이 목사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듯이 명당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태어난 이재록 목사는 마을회관도 지어주고 꽃샘도 정비하는 등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큰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거처/생가/묘소
이 마을은 만민교회의 이재록 목사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도 생가터가 남아있는데, 생가터 아래에는 많은 사람에게 영적 치유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세칭 단물의 생산지인 ‘꽃샘’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간척사업이 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 밀물 때 모습이 마치 거대한 용이 마을을 감싸고 들어오는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곳 주민들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오래전 마을을 돌아 마을 앞으로 빠지던 개웅을 막으면서 좋은 기운이 없어졌다고 주민들은 아쉬워하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의 노인들이 운동을 많이 해야 하는데 운동할 수 있는 장소나 기구가 없어서 설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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