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3리에 속하는 강산마을은 해제면소재지에서 지도 쪽으로 22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3km 정도를 진행하면 우측으로 보이는 강산(糠山, 129.5m) 아래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뒷산인 강산을 중심으로 점단, 서당골, 오약동, 절밑에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나락을 쌓아놓은 형국이라 하여 겨 강(糠)자인 강산(糠山)이라고 칭한 산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지명으로 삼았다. 또한, 이에 속한 점단은 볏단이 하나씩 세워진 모양이어서 이름이 붙었고, 서당골은 서당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다. 또한 외얏골로도 불리는 오약동은 오가피, 골닩초, 산출, 참빗살나무, 벙그나무라 불리는 호랑가시나무 등 다섯가지의 약초가 자생한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일로 감돈리에서 이주한 광산김씨 김덕규(자-도원, 1708∼1771)라고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마을유래지》에는 ‘광산김씨 김덕제가 본래 일로에서 세거하였으나 은거 생활을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 간행한 《내고향 해제고을》(1988)에서는 김순택(金舜澤, 1854∼1914)을 입향조로 보고 있지만, 이는 광산김씨 문중 내에서의 입향기록이다. 이후에 진주강씨와 임씨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강산을 주산으로 하여 우로 청강바위, 좌로는 똥섬이 있고, 앞으로는 널따란 간척지가 펼쳐있어 풍수적으로 꽉 짜인 마을이다. 마을의 주산인 강산 너머에 있는 임수리 임치 마을과 지형적으로 연관이 있다. 임치는 지형적으로 치(키의 옛말로 곡식에서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형국으로 물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곳에서 쌀을 까불면 쌀곡은 임치마을에 떨어지고, 쌀겨만 여기 강산마을 뒷산으로 날아와 쌓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강산이란 마을 지명도 이런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뒷산인 강산에서 비롯된 마을이름은 문헌을 통하여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1912년에서야 해제면 강산동으로 나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함평현 해제면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정기 행정구역 개편 때 무안군 해제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으로 나오다가,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강산동으로 나온다. 이후 1987년 자료에서 해제면 산길3리에 속한 강산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해제면의 진산인 봉대산의 맥을 이은 강산(糠山)은 쌀겨산이라 부를 만큼 쌀과 관련이 크다. 예전에는 이 마을을 빈촌이라 할 정도로 주민들이 어렵게 살았다. 궁벽한 산촌에다 나루터를 끼고 있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다 보니 외지인들이 모여들어 도박과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 마을 앞에 간척사업이 완료되면서 대규모 농경지가 조성되었고, 쌀이 대규모로 생산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처럼 쌀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마을이 되었다 해서 주민들은 미강산(米康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마을 단위로 쌀 생산량이 전국에서 제일가는 마을이기도 하였다.
주요시설
태원농장.
마을변화
태원농장을 비롯하여 주변의 마을보다는 비교적 여유로운 농경지와 주거환경으로 주민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해왔으나, 급격한 고령화 등으로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단합하여 이에 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산마을회관, 강산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간척 사업이 완공되기 전 마을 앞은 거대한 갯벌이었다. 갯벌에서는 각종 해산물이 생산되는 천혜의 자원이 나는 보고였으며, 농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상쾡이를 비롯하여 각종 수산자원이 많았는데 물길이 막히면서 어족자원이 사라져버렸다. 특히 마을 앞 갯벌에는‘안소뿔’이라는 섬이 있는데, 밀물 때 없어졌다 썰물 때 보이는 섬이었다. 이 섬 주변에서는 바지락 등 수산물이 많이 나왔다. 한 사람이 한나절이면 바지락을 5포대 이상 캘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어장이었다. 주민들은 황금어장을 잃었어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해 아쉬워했으며 또한, 간척사업 완공 후 초기에 힘들게 농경지를 만들었으나, 현재에 이르러 벼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에 ‘황새바위’가 있었으나 길을 내면서 없어졌으며, 마을 뒤에 공동묘지들이 들어선 ‘공동산’이 있다. 또한, 동섬 앞에 ‘빈터’라는 지명도 있다. 이는 주민들은 병자년에 전염병이 돌아 빈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 터가 비었다 해서 빈터라고 부른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주산인 강산은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옛날에 비가 오지 않을 때면 해제면에서는 봉대산이 아닌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하늘에서 반드시 응답했다고 해서 주민들은 명산, 또는 우제봉이라고도 부른다. 그 봉우리에는 지금도 제단과 두 개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 비석에는 새겨진 글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산에는 각각의 이름이 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우제봉으로 고을 현감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고, 두 번째 봉우리는 첨사봉으로 무관(武官)인 임치진 첨사가 제를 지내는 곳이다. 세 개의 봉우리 중 제일 북쪽에는 멀리 불갑산을 바라보는 형태의 호성예불봉(好聲禮佛峰)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처를 향하여 예불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유물, 유적
강산(糠山)에는 원갑사(圓甲寺)라는 절이 있는데 통일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강산사였으나 훗날 당산사로, 다시 원갑사로 바뀌었다. 일설에는 사찰에 빈대가 너무 끓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바닷가에 임한 임해사찰(臨海寺刹)로써 호남의 삼갑사인 영암 도갑사, 영광 불갑사, 무안 원갑사에 속하는 사찰이다.
원래 강산의 봉우리 아래에 있는 고사동 곧 구사동으로 부르는 중산골에 강산사가 있었으나, 현재의 자리인 절터고랑으로 옮기면서 원갑사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낡은 절골에서 중산골로 그리고 절터고랑으로 이어진다. 절을 옮길 때 수많은 사람이 중산골에서 절터고랑까지 이어 서서 기와받이를 하였다. 지금도 중산골에는 당시의 절터 주춧돌이 남아있다고 한다. 원갑사의 법당은 극락전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창문은 띠살문으로 아주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법당 외에 요사채 1동과 1897년(고종 16)에 만들어진 탱화 1점이 보관되어 있다. 1984년 2월에 전남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또한 마을의 서당골에는 광산김씨 제각인 여부재(如復齋)가 있는데, 이는 입향조인 김순택의 재실로 1933년에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물 안에는 3개의 편액이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21일에 제를 지낸다.
설화
해제면 내에는 강산의 원갑사를 두고 전해오는 노래가 있다. ‘구경가자/ 구경가자/ 천리강산/ 구경가자’라는 내용의 노래가 전해올 정도로 주민들은 강산과 원갑사를 사랑하였다. 또한 주민들 사이에는 ‘죽어 저승 가면 저승사자가 원갑사 기둥이 몇 개냐고 물어본다.’라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렇듯이 이 지역의 주민 대부분이 원갑사의 불교 신자들이다.
기록물, 문헌
1988년에 해제면의 주민들이 나서서 간행한 《내고향 해제고을》마을의 입향조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산길리 강산마을에는 광산김씨 문정공파(文定公派) 김순택( 金舜澤, 1854~1914)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본디 순택(舜澤)은 일로면 감돈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순택의 부친께서 공직자(?)로 근무하면서 세금을 관리하였는데, 무안세금을 제때에 완납하지 못하여 책임자를 추궁하여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엄벌을 내리자 순택은 재산을 모두 챙겨가지고 양간리 양간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입향한 순택은 죄를 뉘우치는 마음에서 양간다리(양반다리)를 건립하고 생활하다가 다시 산길리 강산마을로 옮겨오게 되었다.’(p.56)라는 내용이어서 이를 다시 남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광복 이후 시작된 간척사업이 여러 사람을 거쳐 현재의 태원농장에 의해 마무리되면서 주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간척지 조성 후 주민들이 한동안 탈 없이 벼농사를 지었다. 그후 농장주의 경작료 인상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현재는 마을 앞 농장을 임대받지 못해 경작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마을 건너인 지도읍 내항리에는 간척지 조성에 대한 공으로 주민들이 태원농장의 소유주인‘이장용공적비’를 세워주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태원농장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간척 사업이 완공되기 전 마을 앞은 거대한 갯벌이었으며, 따라서 갯벌 바탕에 물이 들었을 때는 서남부 지역의 영산강에서 이 마을 앞바다를 지나 칠산바다로 향하는 무역항로였다. 또한, 현재 태원축산 자리가 강산나루터였다. 이곳은 지도로 가는 길목으로서 연륙이 되기 전에는 교통의 번화가였다. 여러 채의 주막이 번성할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