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용리(石龍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북 방향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봉대산을 주산으로 칠산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석용1리에 속하는 석산마을은 아시래, 석산골, 방정, 텃골, 연화동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뿐 아니라 마을의 뒷산까지도 많은 돌로 이루어져 있어 돌뫼 즉 ‘석산(石山)’이라고 했다. 처음에 ‘아시래’에서 조씨들에 의해 시작된 마을이 점차 석산동으로 옮겨와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아시래란 지명은 해제면 소재지에서 돌뫼동으로 올 때면 아스라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최초로 입향한 성씨는 아시래에 자리 잡은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하지만 현재 조씨들은 일부 묘만 남아있고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입향조는 최영해(崔英海, 자-세영, 호-송포. 1655∼1714)이다. 해주최씨는 원래 화순 다지동(茶智洞)에서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삼전도치욕 이후 은거할 곳을 찾아다녔다. 운남, 망운 등지를 다녔으나 찾지 못하다가 해제로 들어와 신정리를 거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외에도 장수황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동래정씨, 밀양박씨, 경주배씨, 광산노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주산인 왕제산(王帝山 또는 王在山) 아래에 자리하여 한쪽으로는 봉대산, 한쪽으로는 서해의 칠산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듯이 왕제산은 왕이 제사를 지냈거나, 또는 거주한 산이라는 중요한 지명이다. 또한, 해제면에서는 꽤 높은 산인데 웬일인지 무안군 지도에는 이 산 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왕을 칭하는 이름 때문에 일부러 빼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이 든다. 주민들은 새벽에 왕제산 정상에 올라가면 중국의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그렇듯이 주변 마을의 어부들은 이 산을 신성시했다. 칠산바다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선들은 대개 왕제산 아래에서 풍어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 산에는 솥을 걸 수 있는 솥건바위와 그 아래 마당바위가 있다. 일국의 왕이 운위되는 왕제산과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 그리고 민간신앙이 어우러진 마을의 지형 속에 숨겨져 있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의 마을이름은 함평현 해제면의 내아사내(內牙士乃)리로 아시래란 지명의 효시였다. 이후 1912년경에 무안군 해제면 아사내리(牙士乃里) 석산동, 연화동, 석령리 등으로 구분되었다가 1917년의 자료에 해제면 석용리 석산동, 용흥리, 신기동, 석령리, 연화동, 외남리 등으로 나온다. 이후 현재의 석용1리 석산으로 개칭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를 보면 원래 이 마을은 함평현 해제면에 속하는 내아사내(內牙士乃)리였다. 이후 1912년경 일제강점기에 무안군 해제면 아사내리(牙士乃里)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후 해제면 석용리 석산동이 되었다가 현재는 해제면 석용1리 석산동으로 구분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칠산바다의 아래의 안쪽에 있는 마을에는 큰 갯벌과 함께 염전이 많았다. 그래서 아시래염전 등 여러 개의 염전이 있었는데, 그중에 해주염전이란 이름도 있었다. 주민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본향을 따서 지은 상호명이었다. 그렇듯이 아시래마을 앞으로는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고랫들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는 지도하고 연륙이 되기 전에는 파시(波市)가 형성될 정도로 흥청거렸던 황금어장이었다. 하지만 물길이 막히자 갯벌이 죽어버려 해산물이 나오지 않는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양동이로 보리쌀을 가지고 가면 그만큼의 고기들을 담아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 마을은 어촌마을로써 물목이 좋았던 곳이었다고 하겠다.
주요시설
석산제(저수지)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개발위원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에서는 원래 불꽃소금이라고 부르는 화렴(火鹽)이 발달하였다. 주민들은 지금도 염분이 많은 물을 받아내기 위한 장치인 솟등을 만들어 화렴을 만들어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은데 이 마을의 특산물이 되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은 간척지로서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는데 ‘민대들’이라 부르고 있다. 민대들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조씨 문중의 민대라는 홀로 된 여자가 마을의 부족한 농토를 보충하기 위하여 막은 간척지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이 간척지는 초기에는 염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목화를 재배하기도 하였다. 목화는 염해에 강한 식물이기 때문에 간척지에 많이 심는 식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대들은 동학혁명 때 동학군들이 훈련을 받았던 연병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동학군들은 보국안민의 깃발을 앞세우고 고막원 전투에 참여했다. 또한, 서남부 지역의 동학군을 지도했던 배상옥 장군은 예전의 서해 무역 항로인 임치진-다경진-창포 등을 다니며 청계면 청천리 집강소에서 대동 세상을 꿈꾸었다. 동학로(東學路)라 붙여진 새주소길은 민대둑을 말한다.
또한 지금은 지하수 개발로 그 용도가 없어졌으나 마을 앞의 샘인 방정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다. 수많은 동학군이 먹었던 샘물이어서 동학샘으로도 부른다. 이 샘은 큰 가뭄이 들었을 때면 주변 마을 사람들의 목마름마저도 해갈해주었던 유명한 샘터다. 이외에 둘가리샘 등도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졌다.
동/식물
대부분 갯벌에는 깔따구들이 많아서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는데 칠산바다에 접한 아시래갯벌에는 깔다구들 많지 않았다. 또한, 마을에는 신목으로 모시는 당산나무와 함께 연화동에는 현재도 수백 년이 됨직한 쥐염나무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아시래 잔등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정자와 함께 당산나무가 있다. 원래 있었던 하나씨당산과 할멈당산 두 그루의 아름드리 당산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죽고, 새로 돋아난 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주민들이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예전에 해제 사람들은 봄철에 이 당산나무의 잎이 어떻게 피는가를 보고 그해 농사를 점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해의 농사 상황을 알아보려고 일부러 당산나무를 살피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신목(神木)으로 여겨 관리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오래전에 폐지되었던 당산제를 얼마 전부터 다시 지내고 있다. 음력으로 정월 열나흗날 주민들이 모두 모여 지내는데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공동으로 모시는 제사이다. 당산제를 지내고 나서부터는 이 마을에 우환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의 유적으로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렸다는 효자 최민현, 창현, 재준과 김해김씨의 효행을 기록한 <해주최씨효열비>가 1972년에 건립되었고, 삼의사(三義士) 중 한 사람인 최선현의 처 밀양박씨의 열행을 기리는 <유인박씨열행비>가 1973년에 세워져 각기 마을 앞에 있다.
또한, 해주최씨 문중 제각으로 애송재(愛松齋)가 있는데, 초기에는 입향조 최영해를 비롯한 최계만, 최유반, 최대명 등 4명의 조상만을 모셨으나, 현재는 다른 조상들까지 전부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85년에 지었다. 제각 앞에 표지석이 있으며 제향일은 음력 10월 16일이다. 마을회관 앞에도 ‘돌뫼동(石山洞)’이란 시를 적은 표지석이 있다. 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향하는 정신이 온전히 담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톳빛 구릉/ 바다로 흐르다/ 왕제산 기슭에/ 잠룡처럼 누워/ 길게 처마를 맞댄/ 돌뫼되었네/ 입향조 창령조씨 민대들 만들고/ 해주최씨 장수황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동래정씨/ 밀양박씨 경주배씨 광산노씨/ 손 모아 둑 막으니/ 살진 뻘 아시래 염전/ 대대손손 자식 키웠네// 수로요충 임치진성/ 천년고찰 원갑사 가슴에 품고/ 문장은 비단 되며/ 덕행은 인물 된다는/ 해동공자 최충의 가르침 따라/ 갑오년 동학 삼의사/ 부정과 외세 피로 맞서니/ 역사의 작은 부침도/ 여기 돌뫼동에 있었네/ 이곳/ 작은 벌/ 너와 내가 태를 묻고/ 형제자매 나고 자란/ 석산동은/ 언젠가/ 우리 모두 돌아올 고향이라네/ 世世益興昌할 터전이라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해제면 석산마을은 조선조 말 개혁의 선봉에 선 동학혁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인 최재익(崔在翼)의 아들 최장현(璋鉉. 자-文彬, 호-敏齋(1850-1894), 선현(善鉉. 자-善永, 호-淸波. 1867-1894)과 최재화(崔在華)의 자 최기현(奇鉉. 자-炳鉉, 호-春菴. 1866-1894)은 종형제간으로 함께 농민혁명에 가담하였다가 같은 날 체포되어 같은 날 유명을 달리하였다. 최장현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 석용리 540번지에서 살았다.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농민혁명 당시 최장현 형제 집안의 경제 규모는 논 9마지기 밭 20여 마지기 정도를 경작하던 중농층으로써 인근에서는 지식층으로 꼽혔다. 이들은 함평에 있는 향교까지 다니면서 학문을 배웠다. 마을에서는 세 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엄혹한 유신 시대인 1973년에 삼의사비(三義士碑)를 마을 앞에 세워 후손들의 교육지표로 삼고 있다. 또한, 최선현 의사의 생가터에서는 동학혁명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총구 없는 개머리판이 발견되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삼의사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차당피당불입당(此黨彼黨不入黨, 아무 데도 가입하지 말라는 가르침)” 말이 가문의 유훈처럼 전해지고 있어 당시 동학의 피해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마을에는 경찰 출신의 후손들이 많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효행열부(孝行烈婦)로서 나라에서 기리고자 세웠던 <해주최씨효열비>에 새겨진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효자인 최재준은 1840년(헌종 6년)에 출생하여 8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예의범절이 어른과 같았고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니 어머니께서 홀로 산다고 느끼지 않게 하였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매일같이 묘에 올라 통곡하니 인근 사람들은 최 효자를 흠모하였다.
같은 해주최씨 문중인 효자 최창현 공은 1865년(고종 2년)에 태어나 5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공은 어른과 같이 법도를 지켰고 장성해서는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머슴살이하면서 홀어머님을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가 병환에 들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수일간을 더 살게 한 애틋한 효성으로 인근을 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집에서 어머님 묘소를 지켰다.
또한, 효자 최민현 역시 어려서부터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모셨다. 밥상에는 항상 고기반찬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원하는 음식은 언제라도 구해 드렸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할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고 사후에는 살았을 때처럼 3년간을 묘소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며 통곡하니, 이 마을에는 불효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열부인 김해김씨 김씨 부인은 1847년(헌종 14년)에 김무용의 딸로 태어나 출가한 지 얼마 안되어 부군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김씨 부인은 손가락의 피를 남편에게 먹여 3일간 연명케 하였으나 남편이 타계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도 곧 뒤를 따르려 했으나, 병들고 늙은 시모가 계셔서 뜻을 바꾸어 시부모를 잘 받들며 미망인으로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