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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수1리 해제면 임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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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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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 세대, 인구수
- 총 43세대, 인구수 62명(남 31명, 여 31명)
- 자연마을 구성
- 임수리(臨水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앞으로는 태원간척지가 있으며 서해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신안군 지도읍이 있다. 원래는 임치, 수포, 석포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임치와 수포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임수리라는 리명(里名)도 임치와 수포에서 한자씩 따서 만들었다. 여기에서 임수1리에 속하는 임치마을은 바닷가에 접한 자연마을로 임치와 동령재로 이루어져 있다.
- 지명유래
- 쉽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이 마을의 지명은 우선 지형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무안의 《마을유래지》에서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동릉제」라 부르다가 그 후 사람들이 물가에 이르렀다 하여 「임수리(臨水里)」라 불렀으나 어느 풍수가가 마을의 모양이 치(淄)처럼 생겼다 해서 「임치(臨淄)」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즉, 글의 문면 그대로 마을의 형국이 곡식 따위를 까불러서 겨를 날리는 키의 옛말인 치에서 임치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형유래설에 대하여 임치(臨淄)라는 지명이 중국 산동반도에 있었던 제(齊)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와 동일한 지명이어서, 이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는 설이다. 이는 특히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임치(臨淄)는 중국 산동반도의 고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임치라는 지명이 중국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으로 추정되며, 지형에서 비롯된 것은 후일 한자에 맞춘 풀이로 여겨진다고 표명하고 있다.
- 마을형성(입향조)
- 무안의《마을유래지》에서는 ‘이 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자흥(朴自興)으로 경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지내다 사화(士禍)로 인하여 유배되어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1500년경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박씨 문중의 족보는 볼 수가 없었으며, 주민들은 이 마을의 입향조로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등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풍수지리(마을형국)
- 《마을유래지》에서 임치(臨淄)라는 지명은 ‘마을의 지형이 치(淄)처럼 생겼다 해서 「임치(臨淄)」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마을의 형국이 곡식 따위를 까불러서 겨를 날리는 키의 옛말인 치의 모양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의 좌·우에 있는 임치진과 동령재가 치의 지형으로, 임치마을에서 키질하면 앞에 있는 ‘겨 강(糠)’자 강산(糠山)에 쭉정이가 쌓이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곡식을 까부르는 데 쓰는 ‘키 기(箕)’라는 글자가 구개음화를 통해 ‘ㄱ→ㅊ’으로 변하는 예는 있어도, 경구개음 ㅊ(/tɕʰ/)음이 연구개음(/k/) ㄱ으로 곧 ‘ㅊ→ㄱ’으로 변하는 언어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임치(臨淄)의 치(淄)자는 ‘검은빛 또는 중국 산동성의 내무현(萊蕪縣)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들어가는 강을 뜻한다.’라고 어학사전에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임치(臨淄)라는 지명을 중심으로 지명 유래를 조사한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대 이래로 산동반도의 임치(臨淄)는 한반도와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 지명을 따서 임치로 명명한 것은 이곳이 중국의 강남지역뿐 아니라 산동반도와의 교류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정에서 최후에 무너진 제나라 세력들이 한반도로 대거 피신한 3세기 동아시아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추정된다. 즉, 제나라 마지막 제후였던 전횡(田橫, 기원전 250~202) 장군의 치동묘와 사당이 군산 어청도와 외연도 등에서 지금도 당산제로 모셔지고 있음은 물론, 당시 제나라의 청동검이 영암과 완주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치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등장한다. 임치지역은 원래 백제 고록지현(古祿只縣, 일명 개요현)이었는데,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염해현(鹽海縣, 757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에서 이를 임치현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관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더욱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나타난다. ‘909년 궁예는 왕건을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해 다시 나주로 출정하게 한다.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영광군 염해현(현 영광 백수읍, 염산면 일원 또는 무안 해제면 임수리 추정)에 이르러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파견한 배를 사로잡아서 돌아왔으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며 넉넉히 포상하였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달장군 능창(能昌, ?~ 910)은 처음에는 왕건과 협력하다가 이후 반기를 들어서 왕건에게 체포되어 철원의 궁예에게 끌려가서 처형당하는 서남해의 독자적인 해상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위급한 처지에 빠진 자신을 구해줄 세력을 중국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 년 전에 임치라는 곳은 바다 건너 중국과 일상적으로 교통하고 소통하는 서해상의 거점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임치진성이 목포만호, 다경포만호, 법성포만호, 검모포만호, 군산만호를 통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음과 아울러, 동국여지승람(1481)에도 ‘임치진은 전라우도수군첨절제사의 관아가 있고, 검모포 등 8만호를 관할했다.’라고 했다. 이처럼 서해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했던 임치진을 두고 주민들은 비룡도강(飛龍渡江)의 명당터로 보고 있다.
- 마을성씨
- 복합성씨의 마을임.
마을변천
- 마을 명칭 변경
- 행정문헌인 1979년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임치리로 나오며 이후 임치동과 임치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삼국사기》에서는 원래 이 지역이 백제에 소속된 일명 개요현으로 부르는 고록지현이었고, 신라에서 염해현으로, 고려에서 임치현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원래 동릉제라고 부르다가 임수리로 바꿨고, 이후 임치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 행정구역 변경
- 이 지역은 원래 백제 고록지현에서 신라의 염해현 그리고 고려의 임치진 등으로 역사서에 나온다. 하지만 세부적인 행정구역의 변화는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면에 속한 임치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으로 편입되어 해제면 석포리 임치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석포리, 수포동, 임치동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임수리 임치와 수포로 나온다.
-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 오랜 역사와 문화에 비해 이 마을에는 농지가 부족하였다. 그렇듯이 마을은 지금도 큰 활력이나 활기가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주민들은 부족한 땅을 마련하기 위하여 광천, 수포, 임치 등 세 마을의 온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선창에서 강산까지 둑을 막아 농경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염전도 조성하여 부농을 꿈꾸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아 현재는 염전마저도 대부분 외지인 소유라고 한다.
- 주요시설
- 미기재
- 마을변화
- 미기재
생활환경
- 마을조직
- 노인회, 부녀회
- 공동이용시설
- 임치마을회관
- 전통식품/특산품
- 미기재
자연환경
-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 칠산바다의 끝부분에 해제반도 안쪽으로 휘어져 자리한 임치는 천혜의 해상포구였다. 마을 오른쪽 끝자락에 있는 임치포구가 그것이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각종 해군진이 설치되었다. 물론 해제주민들이 영광이나 무안 또는 목포 등으로 나갈 때 사용했던 포구이기도 하다. 예전의 포구에는 주막이 두 군데나 있을 정도의 규모였고, 일제강점기 때는 정기 여객선도 다녔다. 하지만 육상교통의 발달과 태원간척지 등이 형성되면서 뱃길이 끊겼다. 현재 임수저수지가 있다.
- 동/식물
- 미기재
-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 마을 맞은편에는 산길리의 강산(糠山)이 있는데 강산의 한자가 쌀겨 강(糠)자다. 그래서인지 앞마을인 임치에는 치의 손잡이 격인 땅구지, 고지끝이란 지명이 남아있다. 또한, 망재는 봉대산의 봉화대와 연결되는 고개로 성안의 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6.25한국전쟁 때는 봉화를 피우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동령재는 성에서 봤을 때 동쪽의 재에 해당하여 붙인 이름이다. 동아시, 성하시, 깎굴산, 아시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 축제/제전/의례
- 마을에서 망재를 지나 수포로 가는 고개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하나는 둘레가 3m가 훨씬 넘는 수형이 잘 잡힌 팽나무이고, 또 하나는 고사목이 되어가는 구슬나무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에서 지낼 수 없었을 때는 개인이 맡아서 지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지내지 못하고 있다.
- 유물, 유적
- 이 마을에 있었던 임치진성(臨淄鎭城)은 사실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에서 기원한다. 문헌에 나오는 임치진은 지도(智島)를 마주보는 해안(對岸)에 위치한 수군진이었다. 임치진성의 흔적은 훼손되어 있긴 하지만 지금도 일부가 남아있다. 임치마을 앞의 서해바다는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航路)일 뿐만 아니라, 한양 등으로 가는 조세운반의 해양 길목에 해당되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곳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임치진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와 동국여지승람(1481년) 등에는 전라우도수군첨절제사가 있었던 임치진과 임치진성이 지녔던 규모와 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서 전한다. 이외에 기록된 ‘임치진 지도’ 등을 살펴보면, 성문(城門)은 동·서·북문 등 세 개가 있었고, 관아 건물로는 객사를 비롯하여 동헌, 내아, 사령청, 장교청, 진무청과 화약고, 군기고, 환상고 등의 창고가 성안에 있었다. 현재 문지(門址)나 성내의 건물지 등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성축의 범위는 파악되었다. 자료를 보면 진성의 평면 형태는 대략 남동-북서의 타원형에 가깝다. 전체 길이는 480m로써 소형이며, 전체적인 지형은 남쪽과 북쪽의 낮은 봉우리와 그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임치진성은 입지상 우리나라 읍성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벽의 축조기법을 살펴보면,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을 이용했다. 북쪽 해안은 천연 낭떠러지를 이용하여 상부만 축성하고 그 밖에는 70×60㎝의 방형 석재를 이용해 쌓았으며, 동쪽에 길이 100m, 높이 350㎝, 폭 2m의 성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설화
- 마을의 서낭당 내지는 당산목이었던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을유래지》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오래전에 마을 사람들이 이유 없이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주민들은 영문을 몰라 안타까워하던 차에 어느 스님이 지나다가 마을의 지형을 보고, 마을에서 신을 섬기지 않아 변을 겪는다고 하였다. 그 뒤 주민들이 마을 뒤편에 나무를 심고 제사를 모시자, 그때부터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기록물, 문헌
- 성내에는 순찰사이사명선정비(兼巡察使李公師命清德善政碑, 1685年), 첨절제사강제선정비(僉節制使姜公齊清德善政碑, 1685年), 첨절제사위혁만선정비(僉節制使魏公赫萬清德善政碑, 1707年), 첨절제사강필윤선정비(僉節制使姜侯必潤清德善政碑, 1807年), 첨절제사정신동영세불망비(僉節制使鄭侯信動永世不忘碑, 1863年)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에서 선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열부각에는 ‘열부숙부인남양홍씨기적비’(烈婦淑夫人南陽洪氏記蹟碑)가 모셔져 있는데 1989년에 세운 비각이다.
인물
-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 미기재
-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 미기재
- 거처/생가/묘소
- 임치진 성안에는 초정 김성규 일가 묘가 조성되어 있다. 김성규는 조선 말에 전라도 양무감리와 장성군수 그리고 무안감리를 지낸 인물이다. 김성규 부부 묘와 손자인 김방한(극작가 김우진의 아들. 김우진은 무안 월선리 말뫼산에 초혼묘가 있음) 교수 부부의 묘가 있고, 오른쪽엔 상석만 놓여있는 묘 등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 주요사건사고
- 미기재
-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 미기재
-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 미기재
- 주민요구사항
- 미기재
-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 미기재
- 기타사항
-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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