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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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2리 해제면 수포 작성
  • 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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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0세대, 인구수(남 38명, 여 36명)
자연마을 구성
임치와 수포 두 개 마을로 이루어진 임수리(臨水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앞으로는 태원간척지가 있으며 서해바다 건너 맞은편에는 신안군 지도읍이 있다. 봉대산 아래쪽으로 임치진의 뒤쪽에 있는 수포마을은 수포와 석포, 원머리를 포함하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지명유래
임수리는 임치와 수포에서 한 글자씩 따온 지명이며, 임수2리에 속하는 수포(水浦)라는 지명은 물이 잘 나오는 포구라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돌캐 또는 돌개라고도 부르는 석포는 마을 앞에 있었던 포구 주변에 돌과 바위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외에 돌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민들 말에 따르면 임치마을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 수포마을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안《마을유래지》에는 담양전씨(潭陽田氏)를 입향조로 기록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경주정씨(慶州鄭氏)가 먼저 왔다고 한다. 이외에 다른 자료에서는 이 마을의 입향조에 대하여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들 말대로 경주정씨 족보를 추적해본 결과 경주정씨 해제면 입향조는 정조(正祖) 시대에 광주에서 들어온 정태눌이며 천장리 보천과 창매리 매당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족보에 정인신이 수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분이 입향조로 추정된다. 정인신은 1759년에 태어났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뒤에 땅재라는 고개가 있으며 그 뒤에 ‘칠유(七酉)잿골’이 있다. 봉대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봉우리가 7개인 데서 비롯된 지명인데, 여기에 ‘닭 유(酉)’자가 들어있는 이유는 이 골에서 사는 닭이 점심시간 무렵이면 어김없이 울어서 주민들 생활에 편리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인근의 용흥마을에서는 ‘칠오(七五)짓골’ 또는 ‘칠오지(七烏地)골’이라고 부른다. 7마리의 까마귀가 있는 형상의 골짜기란 의미이며 여기에 전주최씨 선산이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수포라는 마을의 이름은 1912년에야 돌이 많은 포구라는 뜻의 석포리(石浦里)로 나온 듯하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임수리 수포동(水浦洞)으로 나왔다가 1987년의 자료에서 수포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원래 백제 고록지현에서 신라의 염해현, 고려의 임치진 등으로 역사서에 나온다. 하지만 세부적인 행정구역의 변화는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면에 속한 임치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으로 편입되어 해제면 석포리 임치동으로 나오지만 임수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소속된 수포동으로 표기되었다가.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처럼 해제면 임수2리 수포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지만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을 정도로 주민들 간의 양보와 협조가 잘 이루어지는 마을이다. 지리적으로 이 마을은 서북향이어서 봄이 없는 마을로 비닐하우스 재배가 어려운 지리적 특성이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벼농사와 함께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와 양배추 등의 밭작물을 재배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주요시설
마을이 넓어서 수포와 석포에 각각 마을회관이 있다. 수포 마을에 무안해성교회가 있는데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세워진 교회이다.
마을변화
수포마을은 예전부터 물이 좋았다. 마을 앞에 조답이라는 방죽이 있었는데 두렛물이라 할 정도로 수량이 많아서, 주변 마을뿐만 아니라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간척지에다가 농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수포에서 임치로 가는 길가에 동대기 샘이 있었다. 물이 얼마나 많이 났던지 조답방죽과 함께 간척지의 논만 아니라 임치마을 사람들의 식수까지 충당하였다. 해제에서는 드물게 부촌으로 소문이 났으며 물길이 좋은 포구여서 지명도 수포라 하였다. 이 마을은 주민들 말처럼 옛날에 기름이 날 정도란 말이 나올 만큼 사람도 많았고, 돈거래가 많아 잘 살았던 곳이다. 7∼8년 전에 마을에서 상수원을 마련하기 위해 상수정을 파면서 방죽이 없어졌고, 지하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동대기 샘도 점차 고갈되었다. 물길이 막히고 없어지면서 예전의 화려한 명성은 사라져 갔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수포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칠산바다를 향해 뻗어 나온 수포마을의 원머리는 민대들의 제방 첫머리에 해당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는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바위였다.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면 행정을 보았던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목화저장 창고가 있어 해제에서 재배되었던 목화를 목포로 반출하는 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임치포구가 여객을 실어 나르는 포구였다면 이곳은 물류를 실어 나르는 포구였다. 이러한 이유로 수포마을의 원머리는 일제강점기 때 해제에서 가장 큰 포구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에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큰망재, 작은망재, 까꿀산으로 부른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작은 망재에서 키질을 하면 검불은 까꿀산으로 모이고 알곡은 망재로 모인다고 한다. 망재는 조선시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서해안의 동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망재는 모양이 노적가리를 닮았다 하여 노적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식물
수포마을에서 망재를 지나 임치로 가는 고개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는 둘레가 3m를 넘는 팽나무이고 또 하나는 고사목이 되어가는 구슬나무이다. 모두 임치 마을과 관련되는 나무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돌캐라고도 부르는 석포에서 용흥으로 넘어가는 재를 ‘하나재’라고 한다. 또한, 해성교회 너머를 ‘몽둥이골’이라 하고 수포 삼거리 주변을 ‘나무다리재’라고 불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 기와공장이 있었다. 간척을 위한 물이 막히기 전에는 교회 잔등에 황토가 널리 퍼져 있어 그곳에서 기와를 구워 외지로 보내기도 했다. 면민들이 주주가 되어 운영했던 임수리의 해제염전 터는 4~5년 전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는 이후 농경지로 변했다. 해제염전의 발전에 공을 세웠던 김상술 선생의 공적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지금은 없지만 얼마 전까지 마을에 남아있던 상여는 주변 마을에서까지 사용하던 귀물로 신안군 지도에서 빌려 가기도 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마을 입구에 효자각이 있는데, 논 가운데 있는 효자각은 김해김씨 김두천 공의 비를 모시는 비각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훼손 상태가 심하다. 김두천(1831-1890, 자/두익, 호/인헌)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마다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년씩 시묘살이를 했다. 자기 고생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효가 부족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였다. 김씨 문중에서는 공의 효성을 후손들이 본받게 하려고 장가를 가거나 김씨 문중에 시집을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효자각에 들러서 참배하도록 하였다. 효자비 앞에 상석은 명절이면 상을 차리고 재배하는 자리였다. 비각은 1925년에 세웠다.(자료에는 1920년에 세웠다고 하나 고갑자를 잘못 해석한 것) 그동안 수차례 보수했지만 지속적인 관리가 되지 않아 홍살대는 빠지고 부식되면서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칠산바다를 향해 뻗어 나온 원머리에는 민대들의 제방 첫머리에 해당한다고 이름 지어진 마당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주민들에게 사랑받았던 놀이터였으며, 원머리는 일제강점기에 해제면의 행정을 봤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목화 저장창고가 있었는데 해제에서 재배된 목화를 목포로 실어 내는 기지였다. 일제 때 임치포구는 주로 여객을 날랐고, 원머리는 물류를 나르는 해제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서해랑길 무안 31번 코스가 지나고 있다.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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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5.07.0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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