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천장리(泉壯里)는 서쪽으로 금산간척지와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장동, 보천, 돌기, 백동 등 4개의 행정마을로 이루어진 천장리는 보천과 장동에서 이름을 땄다.
여기에서 천장2리에 속하는 보천마을은 해제면 수암사거리에서 해제면 외곽도로를 따라 지도 방면으로 진입하다 보면 약 3km에 있는 첫 번째 마을이다. 원래 사철 풍요로운 수질을 자랑하는 마을의 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이다.
지명유래
보천(寶泉)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이름 그대로 마을에 보배로운 샘이 있어서 붙여졌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구등과 발산 마을에 조선시대 양곡 공동 보관 창고가 있었는데, 이 마을은 창고를 뒤로 두고 있는 마을이라 ‘배창(背倉)골’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 이진운(李眞運, 호-해산, 1773~1834)으로 본래 해제면 덕산리에 살았는데, 19세기 초에 공이 신안군 지도(비문에는 진하산면)에서 해제면 덕산리 슬산으로 가는 중 잠깐 이곳에서 쉬었다. 그때 잠깐 풋잠이 들었는데 돼지 떼가 몰려오는 꿈을 꾸고, 이곳에 터를 잡으면 부자가 될 것으로 생각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암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의 형국이다.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었던 쌍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금산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구등 마을 뒤의 천둥산을 구시통으로 보고 있고, 성포들로 나 있는 쪽을 소락가운데라 하여 꼬리 부분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마을 뒤쪽으로 소의 등처럼 둥근 산지가 있고, 마을 앞쪽으로는 농경지와 해안 갯벌이 펼쳐져 있어 풍부한 생산력과 기운을 지닌 마을형국이다.
마을성씨
함평이씨, 김해김씨, 경주정씨, 광산김씨 등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역사적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다. 이후 1906년에 무안군에 소속되어 1912년에는 해제면 보천동으로 나왔다가 1917년에 해제면 천장리에 속한 보천동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바다와 육지가 함께한 지형으로 비교적 풍요로운 반농반어의 생계를 유지해왔던 이 마을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지만 서로 양보하고 협의하여 사소한 분란도 없으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주요시설
해제남부교회.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보천마을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 샘이 유명하다. 금산방조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큰 장어가 살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겨울에 소여물을 줄 때도 물을 데우지 않고 샘물을 떠서 바로 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물이 따뜻해서 이끼가 많이 자랐으며, 수량이 많아서 주민들이 1년에 두 차례씩 청소할 때마다 바닥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샘의 수량이 풍부하여 저수지가 없어도 마을 앞 논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앞에 있는 들을 말하는 ‘갯모실’이 있으며, 마을 앞들에서 ‘감나뭇재’로 연결하는 긴 등성이를 말하는 ‘진등’이 있다. ‘진구지’와 ‘잿등’의 지명도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좋은 석간수로 인해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 ‘물 타러 간다’라는 민속놀이도 있었는데, 마을의 물이 좋다고 주변에 소문이 나서 정월 보름이 되면 주변 마을 사람들이 물을 떠 가려고 왔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정월 보름이면 잠을 자지 않고 막대기를 들고 샘을 지켰다고 한다. 물을 뜨러 오는 옹기를 막대기로 깨기 위해서다. 지금은 그곳에 관정을 묻어서 주민들 상수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주민들은 물이 좋아서 마을에 장애인이 없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는 당산제를 크게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마을의 형국 중에서 소의 꼬리 부분으로 보고 있는 성포들 쪽의 ‘소락가운데’ 위치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쓴 사람들은 바로 옮겨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소의 꼬리 부분이어서 꼬리를 흔들면 버티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남부교회가 있는 자리를 소머리로 보고 있다. 소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딸랑딸랑하듯이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해제와 지도 간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새로 냈는데, 그 길이 소의 목을 자르는 형국이 되어 마을에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길이 나기 전에는 이 마을은이 해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마을 주변에서 금을 채굴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대섬에 금송아지가 묻혀 있다고 주민들은 믿었다.
기록물, 문헌
마을에 세 개의 비석이 있다. 1982년에 세운 비로 변시연 선생이 마을 입향조 이진운 선생을 찬한 ‘해산함평이공유장비’와 그 옆에 ‘죽헌이선생유적비(이윤서. 1850-1924)’ 그리고 ‘용계김선생추모비(김종희)’가 있다. 죽헌과 용계 선생의 비석은 제자들이 세웠으며, 죽헌 선생은 유명한 선생으로 육영재라는 서당에서 ‘해제 4선생’이라고 부르는 신등의 강율수와 매곡의 김용수를 가르쳤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계홍(소설가)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주민들이 서로 화합하면서 살고 있는 마을의 전통이 깊다. 이에 6.25한국전쟁 때에도 마을에 인민군 면당위원장이 있었으나 주민 중에서 피해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보천마을 앞 천장삼거리 곧 현재 해제남초등학교
근처 삼거리는 예전에 사람들로 왕래가 많았던 번화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