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구산1리 몽탄면 유곡마을 작성
  • 유곡마을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柳谷은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지형을 보면 불당골에서 내려오는 큰 계곡과 작은 계곡이 있다. 계곡 주위로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이 주변 마을을 유곡 버드나무골이라 부른다.(주민들 중 幽谷이라 쓰는 사람도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1890년대 후반 원구산 마을에서 이주해온 인동장씨 장찬식(자-찬유, 호-난고, 1853-1911)이다. 공은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박사를 거쳐 홍문관대제학과 한성판윤을 역임한 정통관료 출신이다. 인동장씨 족보를 보면 공은 동학혁명(갑오경장)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인동장씨 장병윤씨가 1870년경에 원구산 마을에서 농사 짓기에 편리한 이곳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인동장씨가 이곳 구산리에 터를 잡은 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猛虎出林臥犬形의 자리다. 이는 호랑이가 숲에서 나와 들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앞에 개가 움츠리고 있는 형국으로 지관들이 이상적으로 보는 지형이다. 실지로 인동장씨 입향조의 묘와 제각은 개가 웅크리고 있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파출소자리 뒷산은 왕이 나오는 명당이라고 한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에는 현재 구산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석진면 벽류동리와 호암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柳谷리 石峴리 碧流동 九山동 虎동 등이 나온다. 이어 근래의 자료인 198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유곡 벽류동 호동이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현리 유곡 벽류동을 합하여 구산리라 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몽탄기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물건이었다. 매우 번성했으나 제각 등에 사용하는 수요로 버티다 어느 순간 한 번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포구가 가까워 숭어, 장어, 해파리 등이 풍부했다. 함께 몽탄면 소재지를 구성하고 있는 사천리와는 약간 분리되어 있는 생활권이다. 철길이 주요 교통수단일 당시 5~7칸짜리 기차가 운행되었고 주요교통수단이었다.
주요시설
장터는 마을 앞 철도 건너에 40여년 전까지 있었다. 원래 몽탄면의 장은 인평마을 앞 잉어산 자락에서 공수장으로 있었다가 사천리를 거쳐 마을 앞으로 온 것이다. 기와공장이 많을 때는 장도 잘 되었다. 특히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나주 사람들이 많이 와 번성했다. 하지만 둑이 막히면서 뱃길이 끊어지자 장도 점차 쇠락하였다. 이 마을에도 주재소와 우체국 병원 그리고 두 개의 주조장이 있었으며 마을 뒤 건지봉 중턱에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다. 현재도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도축장도 있었다. 몽탄면 복지회관이 있으며 복지회관 건물 안에 몽탄면주민자치센터와 모아작은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마을변화
철길 건너에 집이 여러 채 있었으나 빈집이 된 이후 철도 주변 정비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옛 장터에는 항샘(항아리가 묻혀 있는 샘)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유곡샘 관음골샘 등 세 개의 샘이 있었다.
전통식품/특산품
이 마을은 구산2리와 함께 몽탄기와의 중심지였다. 운송로가 확보되고 기와의 재료인 양질의 흙이 있기 때문이다. 기와가 번성할 때는 9개의 공장이 있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는데 시대가 변하고 가옥의 구조가 바뀌면서 이제는 한곳도 없다. 주민들 중 기와 굽는 기술을 가진 사람도 남아있지 않아 과거의 화려했던 몽탄기와의 명맥을 잃을까 염려된다. 또한 몽탄막걸리도 유명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몽탄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갓재봉이라 부르는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유곡과 원구산 사이로 대치천이 흐른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쇠쟁이는 마을에서 내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새재에서 와전된 지명으로 추정되며 불당골은 불당동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불당골에서는 지금도 기와 등 생활도구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주민이 밭을 경작하다가 범종을 발견하기도 했다. 가는골은 불당골 밑에 있는 골짜기로 불가와 관련된 지명인 관음골이 아닌가 여겨진다. 반곡은 반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815번 지방도로가 나 있어 평평하고 반듯한 길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과 사천리 만복동 사이에 건지봉에서 내려오는 한줄기 맥이 조그마한 고개를 이루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고개를 반고개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화되어 반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어떤 주민은 구산 사람들이 잘 되려면 호랑이의 시야를 가려야 한다고 말한다. 실지로 구산들에 9개의 기와 공장이 들어섰을 때는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로 호랑이의 시야를 가려 주민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마을이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와공장이 없어지면서 연기가 사라지자 마을 남자들이 우환을 겪게 되고 마을의 발전이 정체되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이 집안의 후손 집에서 수많은 교지와 첩지를 볼 수 있었다. 무안에서는 드물게 많은 첩지와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림잡아 50여점이 넘는다. 이중에서 4점이 넘는 홍패 교지도 있었다. 교지란 조선시대에 임금이 문무관 4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던 辭令을 일컫는 것으로 문과·무과의 대과에 합격하면 홍패교지, 문과·무과의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교지를 준다. 마을 탐방을 통해서 많은 교지를 보았지만 홍패교지는 매우 드물었다. 추정컨대 이 집안은 구산리에 터를 잡은 이후 대대로 벼슬을 했던 집안으로 여겨진다. 기록에 따르면 문집도 있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몽탄역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추진위원장으로 대전에서 시위를 진행하였다. 몽탄역은 사라지지 않고 12년 전쯤 무인화 되었다. 농어촌공사 경관사업과 거점사업 등이 진행되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사람들끼리 협조하고 결과에 순응하는 분위기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도로(구, 815지방도)가 마을을 가로지른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몽탄의 인구가 만 2천명에 이를 때가 있었다. 5개교가 있을 정도로 많은 인구였다. 몽탄 전체의 발전에 기차가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다른 교통수단들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기차가 다녔다는 것은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다. 몽탄지역에 막걸리가 유명했는데 명산, 사창, 구산에 주조장이 있었다.
기타사항
남진 외삼촌 집이 옛 장터 인근에 있었다.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