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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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산1리 일로읍 인의산 작성
  • 인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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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74세대 11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일로읍에서 체육중학교와 품바 발상지의 비(碑)를 지나서 조금 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상사바위의 전설을 안고 있는 마을인 청호리로 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뒷산이 마치 마을을 병풍처럼 받쳐주고 있는 인의산 마을로 가는 길이다. 뒷산인 인의산의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하고 있는 이 마을의 행정구역명은 일로읍 의산1리 인의산 마을이다 뒷산인 仁義山은 높이 152m의 낮은 산이다. 병풍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간척지인 영화농장과 소포들 자방포들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무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넓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 산 능선에는 1.5km 길이의 등산로가 나있으며 산 동쪽으로영산강이 흐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탁 트인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나씨 나경의씨이다. 나경의씨는 1680년경 나주에서 분가하여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이미 청주 韓씨와 나주 林씨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한씨와 임씨의입향 유래는 분명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입향조나 입향유래에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도 없었다. 현재는나주나씨, 경주김씨, 경주이씨, 인동장씨 무안박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인의산 마을은 인의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 안산과 서쪽안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앞에 펼쳐있는 조그마한 들은 중들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나 구정리에서 덕치까지 둑(원머리 둑)이 막혀지면서 농경지가 되었다. 실지로 얼마 전까지 마을 앞에는 배를 맸던 말목이 있었다고 한다.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일제시대 중반 경에 일본인에 의해서 이 둑이 막아지고 관리인은 한국인인 강봉구씨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나분머리 앞에서 만난 이경봉(이 마을 태생. 광주거주)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이교여씨가 당월촌 앞의 자방포를 막았던 해에 이 둑을 막았다고 한다. 또한 이 둑을 막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교여씨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이 한창 붐을 이루던 해의 도로공사 때 관리 소홀로 묻어버려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산의 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또한 당대의 문장가 南坡 정봉징이 처사 임계원에게 지어준 시에 이르기를 “인의 지킨 사람 떠난 뒤에 나의 그대가 인의를 회복했어라 인의를 마땅히 힘쓸 줄 아는데 하물며 땅 이름이 인의이겠는가?” 라고 인의산을 노래 했다. 뿐만 아니라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 영광군 법성포에도같은 한자를 쓰는 인의산이 있다
마을성씨
현재는나주나씨, 경주김씨, 경주이씨, 인동장씨 무안박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일로에서 인의산 마을에 산다고 하면 주변에서 조심하였다고 할 정도로 억센 성질을 인정받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비록 부유하게 살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심한 흉년이 들어도 이 지역 주민들은 영산강에서 나오는 수산물 때문에 굶주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업은 농사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청년회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두 개의 샘이 있다. 큰샘과 서쪽샘인데 대부분 구정리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샘이라고 한다. 새끼샘기샘은 덕치 뒤에 있는데 돌 사이에서 물이 나오고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운저리, 모치등의 물고기를 개메기로 막아서 잡았다고 한다. 대가니와 맛도 많이 잡았고 장어와 벚굴, 기(칠게)를 잡았다고 한다.
동/식물
산두쪽에 회화나무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서 영산강 쪽으로 가면 나분머리(나비머리 형국이라는 뜻)라는 곳이 있는데 현재는 밭으로 변해 있지만 원래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기와나 깨진 그릇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고 특히 나분머리의 중심부에 샘이 있어서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 마을에는 9재[峙]와 3골[谷]이 있다. 현재 9개의 재 중에 임재(마을 입구), 서당재(서낭당), 망재(인의산 입구), 외재(인의산 우측), 장목재(죽산쪽으로 나가는 곳), 뒷당재(덕치 넘어가는 길), 떡재(덕치가는길) 등 7개의 재 이름을 찾았고 나머지 두 개의 이름은 찾지 못하고 주민들의 의식 속에만 남아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선창재를 찾았다. 돈도리쪽으로 넘어가는 재이며 바닷가라 길이 없었다고 한다. 재마다 서낭당이 있어 재를 넘는 사람들은 서낭당에 인사를 하고 넘어야 했다. 또한 초분이 있었다는 초장골을 포함하여, 밤작골, 밭골(밖골) 등 세 개의 골이 있다. 그 외의 남아있는 지명으로 수문이 있었다는 수퉁목, 나분머리 앞의 두텁바위 그리고 마을 앞까지 들어왔던 물길을 건넜다는 강다리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 인의산 기슭에 둔덕처럼 생긴 곳이 있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조개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밭 주인이 이 조개 껍질을 팔아 많은 돈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조개무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안 지역에서 조개무덤이 발견되는 곳은 주로 해안지대인데 대부분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살아왔던 징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마을 뒤에 고인돌로 여겨지는 세 개의큰 바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여있다. 그중 한 개의 바위는 밭주인에 의해서 묻혀버렸는데 후일 그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50여년 전 큰 밭을 개간할 때 돌도끼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산중턱에서는 돌칼이 나왔고 서쪽으로 입구쪽의 땅을 파면 물이 나왔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특히 한국 전쟁 때는 일로에서 대표적인 우익 세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뒷산인 인의산은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전에 극심한 한해가 들었을 때 주민 중 한 사람이 무재봉에 자리 잡은 무덤을 파헤쳐서 경찰에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인의산이 굴이 뚫릴 뻔 했다. 영화농장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이 마을 주민을 포함한 죽산리 구정리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또한 이 산이 새 형국이어서 무덤에 비석이 없다고한다. 왜냐하면 ‘예전에 김씨들이 이 산에 무덤을 쓰고 석물을 했다가 연이어 좋지않은 일이 발생하자 무덤의 비석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 석물을 치우자그 이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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